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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무너진 방역, 남겨진 선택, 멈추지 않는 구조 감기 : 무너진 방역영화는 시작부터 불길하다. 관객은 익숙한 도심,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혼잡한 병원을 목격하며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일상의 장면으로부터 이야기에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상이 무너지는 데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는다. 한 컨테이너 안에서 발견된 다수의 사망자,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가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 사실은 이 재난의 속도와 범위가 평범하지 않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영화 속 바이러스는 치사율 100%, 감염 후 36시간 이내 사망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포를 키우는 건 이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다. 진짜 공포는, 이 치명적인 감염병이 번져나가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국가 시스템과 시민의 무력감이다. 방역망은 존재하지만 느리고, 대응 체계는 복.. 2025. 5. 20.
지금 만나러 갑니다: 기억이 머문 자리, 사랑이 남긴 약속, 다시 돌아온 이름 지금 만나러 갑니다 : 기억이 머문 자리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지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와 남겨진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되짚는 구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고통을 남기기도 하고, 희망을 건네기도 하며, 때로는 그 자체가 ‘사랑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진은 아내 수아를 떠나보낸 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그는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유리처럼 깨질 듯한 균형 속에 있다. 수아가 남긴 사진, 글, 목소리, 사소한 습관들—모든 것이 그의 하루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건 추억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감정의 잔상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 2025. 5. 20.
뷰티 인사이드: 바뀌는 얼굴, 변하지 않는 마음, 끝나지 않은 사랑 뷰티 인사이드 : 바뀌는 얼굴이 영화의 세계에는 단 하나의 기이한 법칙이 존재한다. 주인공 ‘우진’은 매일 아침, 다른 사람의 얼굴로 깨어난다. 성별도, 인종도, 나이도 불분명하다. 그는 어느 날은 젊은 남자고, 다음 날은 노년의 여성이고, 또 다른 날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그의 내면은 그대로지만, 외면은 매일 바뀐다. 이 설정은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느껴본 ‘내가 나 같지 않은 날들’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장치다. 우진은 평범한 직장도, 사회적 연결망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는 가구 디자이너로 혼자 작업하고, 낯선 얼굴을 감추기 위해 택시도 잘 타지 않는다. 외출조차 조심스러운 그의 하루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2025. 5. 20.
소공녀: 남지 않은 집, 지켜낸 것들, 잊히지 않는 이름 소공녀 : 남지 않은 집이 이야기는 집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집을 포기한 사람’의 이야기다. 주인공 미소는 하우스메이트도, 전세 계약도, 반지하 월세방도 아닌 스스로 집이라는 공간을 떠나기로 선택한다. 그 선택은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지키고 싶은 ‘자기만의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지붕’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삶의 사소한 즐거움—하루 한 잔의 위스키, 담배 한 개비의 여유—그 감각들을 지키는 걸 선택한다. 영화는 이 순간부터 ‘소유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는 것들’과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조용히 펼쳐낸다. 미소는 보증금이 오르고 월세가 감당되지 않자 가장 먼저.. 2025. 5. 19.
기생충: 가짜 계단, 진짜 냄새, 벗어나지 못한 집 기생충 : 가짜 계단이야기는 ‘계단’으로 시작해 ‘지하’로 끝나는 영화다. 영화 속 모든 공간은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계단이라는 장치다. 하지만 이 계단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계단은 계급의 경계이며, 그 경계는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깊고 잔혹한 단절로 작동한다.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반’만 지상이다. 거리는 가까워 보여도, 빛의 각도부터 공기의 흐름까지 완전히 분리된 세계다. 우리가 처음 이 가족을 볼 때, 그들은 아래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이미 이 가족이 ‘밑에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이 집에는 유일하게 세상이 보이는 창문이 있다. 하지만 그 창문으로 보이는 건 취객의 소변, 쓰레기, .. 2025. 5. 19.
남산의 부장들: 무너지는 충성, 뒤엉킨 명분, 선택의 끝 남산의 부장들 : 무너지는 충성영화는 단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날, 그들은 모두 침묵했다.”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인 10·26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한 재현이 아닌 권력 내부에 존재했던 ‘충성’이라는 구조의 붕괴를 그린다. 그 충성은 때로는 믿음이었고, 때로는 위계였으며, 마지막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파괴적 선택이 된다. 영화는 김규평(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델로 한 캐릭터)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절대 권력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그 권력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없는 모순된 자리로 묘사된다. 대통령 박통과의 관계는 권위와 충성, 애증과 좌절이 겹쳐진 복잡한 감정의 집합이다. 김규평은 ‘충신’이었고, 그 누구보다 대통령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이.. 2025.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