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 무너지는 충성
영화는 단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날, 그들은 모두 침묵했다.”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인 10·26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한 재현이 아닌 권력 내부에 존재했던 ‘충성’이라는 구조의 붕괴를 그린다. 그 충성은 때로는 믿음이었고, 때로는 위계였으며, 마지막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파괴적 선택이 된다. 영화는 김규평(실존 인물 김재규를 모델로 한 캐릭터)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절대 권력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그 권력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없는 모순된 자리로 묘사된다. 대통령 박통과의 관계는 권위와 충성, 애증과 좌절이 겹쳐진 복잡한 감정의 집합이다. 김규평은 ‘충신’이었고, 그 누구보다 대통령을 잘 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점차 왜곡된 명령과 비합리적인 정책, 공포에 기반한 정국 운영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초반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화기 장면’은 그 상징이다. 대통령과의 연결선, 곧 권력의 상징이자 복종의 상징이다. 김규평은 전화를 받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 담긴 건 명령을 따르지 못할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충성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침묵은 공포로 이어지고, 공포는 결국 행동으로 전환된다. 이 영화에서 충성이란 신념이 아니라 구조다. 누구도 진심으로 대통령을 믿지 않지만, 모두가 구조상 충성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 위계는 언어를 단순하게 만들고, 모든 대화는 상명하복으로 축소된다. 김규평은 그 구조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그조차도 말을 잃어간다. 이 과정은 단지 개인의 붕괴가 아니라, 권력 시스템 자체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는 예고처럼 보인다. 곽상천(실존 인물 차지철을 모델로 한 캐릭터)은 이 충성의 기계적 작동을 체화한 인물이다. 무조건적 복종, 군인적 사고, 폭력적인 언어. 그는 김규평과 정반대의 충성을 보여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방식이야말로 대통령을 파괴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곽상천은 대통령의 ‘마지막 방패’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그 맹목성은 더 많은 균열을 만들고, 김규평의 선택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이 영화가 탁월한 이유는, 단 한 번도 김규평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고뇌하고, 망설이고, 분노하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나아간다. “이건 나를 위한 선택인가, 나라를 위한 선택인가?” 그 질문은 곧, 충성의 정의가 어디까지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충성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극도로 조밀한 시선과 감정의 온도로 그려낸다. 그리고 관객은 묻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충성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그 충성은 정말 끝까지 지켜야 했던 가치였을까.
뒤엉킨 명분
작품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는 점점 명분의 정당성과 진실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이 작품은 충성의 붕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충성의 자리에 남겨진 ‘명분’이 어떻게 논리처럼 보이면서도 실상은 감정의 산물이었는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나는 옳았다”라고 말하지만, 그 명분은 더 이상 공적 가치에 기초하지 않고, 점차 자기 보존과 판단의 피로 속에서 왜곡된 선택으로 전락해 간다. 김규평은 분명 처음에는 고민한다. 그는 단순히 ‘살기 위한 쿠데타’를 꾀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끝까지 체제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판단은 점점 국정이 아닌 사사로운 감정과 분노에 기초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김규평은 ‘정치적 소외’를 경험한다. 이 영화는 그 소외의 감정을 ‘명분’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김규평의 고독한 시선, 침묵의 표정, 그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내뱉는 순간을 통해 “정당화되지 않는 감정”이 어떤 식으로 명분으로 탈바꿈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뒤엉킨 명분’은 곧 권력자 자신이 믿고 싶은 현실이기도 하다. 김규평은 자신이 제거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 사이에서 점점 논리를 조작해 나간다. 그리고 그 조작은 자신에게조차 인지되지 않은 채 하나의 확신으로 굳어진다. "대통령은 이미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명분. 하지만 관객은 알 수 있다. 그 명분에는 순수한 ‘정의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실감, 배신감, 사적 감정까지 얽혀 있는, 복잡하게 뒤엉킨 심리의 총합이다. 반면 곽상천은 명분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기울어진 권력의 저울에서 ‘끝까지 무거운 쪽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는 행동한다. 이유는 항상 나중이다. 그 방식은 무자비하고 거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정직한 권력 행위자’ 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권력이 곧 명분’이라는 냉혹한 진실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의도적으로 ‘선악 구도’를 흐린다. 관객은 어느 한쪽 편에 서기가 어렵다. 김규평이 주인공이지만, 그의 명분도 완벽하지 않다. 곽상천은 반감의 대상이지만, 그의 방식은 권력 현실에 더 가깝다. 심지어 대통령마저 지켜야 할 무언가를 잃은 사람처럼 그려진다. 그는 통치자라기보다, 무너지는 정권의 불안한 상징으로 존재한다. 결국 해당 작품이 그려낸 명분이란 객관적 기준이 아닌, 무너진 권력구조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내적 정당화’의 결과물이다. 모든 인물은 자기만의 논리로 움직이지만, 그 논리의 근간에는 두려움, 분노, 배제, 열등감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명분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한 기반 위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전혀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하게, 묵직하게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인물의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그 명분은 진짜였는가?" "그 선택은 피할 수 없었던가?" 해당 이야기는 ‘왜’보다 ‘어떻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명분은 이유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쥐고 있었던 건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잔해였음을.
선택의 끝
영화 속의 마지막 30분은 폭발적 사건 없이도 숨이 막히는 전개를 이어간다. 이미 관객은 알고 있다. 10·26의 총성이 곧 울릴 것임을. 하지만 영화는 그 ‘결과’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결정을 하기까지, 인물이 얼마나 고독한 시간을 통과해야 했는지를 정밀하게 포착한다. 김규평은 더 이상 충성도, 명분도 아닌, ‘선택의 책임’이라는 감정의 마지막 레벨에 다다른다. 그는 판단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판단이 가져올 무게도 감당해야 한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권력을 탈취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무너져가는 구조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균형을 자신이 무너뜨리는 선택을 한다. 이 장면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조용하고, 동시에 가장 무거운 결행 장면 중 하나다. 카메라는 발포 순간을 빠르게 소비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김규평의 손가락 미세한 떨림, 숨소리, 침묵에 집중한다. 그는 어떤 감정도 얼굴에 띄우지 않는다. 하지만 그 ‘표정 없음’이야말로 가장 큰 감정의 증거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사건은 벌어진다. 모든 것은 끝났지만, 동시에 시작된다. 카메라는 혼란스럽게 뛰는 병사들의 발소리보다 조용히 앉아 있는 김규평의 얼굴에 머문다. 그는 이겼는가? 구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을 잃었는가? 영화는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선택의 결과는 관객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한다. 이후의 장면은 압도적인 침묵이다. 당일 밤의 혼란, 다음날 아침의 허탈함, 그리고 새롭게 질서가 돌아오는 듯한 착각. 하지만 관객은 알고 있다. 이 선택은 구조를 바꾼 것이 아니라, 단지 권력의 얼굴을 바꿨을 뿐이라는 것. 해당 스토리는 마지막까지도 냉정하다. 주인공의 선택을 미화하지 않고,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어떤 감정으로, 어떤 논리로, 어떤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 선택을 했는지를 차분히 제시한다. 그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선택이다. 이 영화는 단지 김규평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통령이 되지 않아도, 장관이 아니어도, 우리는 늘 무언가의 균열 앞에 놓여 있고, 그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영화는 말한다. “역사는 총성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총성까지 가는 침묵과 주저, 고독한 판단의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그 판단을 내리는 자는 늘 외롭고, 침묵하며,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