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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타인 리뷰: 웃음 뒤 균열, 드러난 민낯, 끝내 남겨진 거리

by 안다미로_ 2025. 5. 21.

완벽한 타인

웃음 뒤 균열

《완벽한 타인》은 시작부터 친근하다. 오랜 친구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 모인다. 유쾌한 농담, 익숙한 대화, 부부 간의 장난스러운 핑퐁. 카메라는 마치 다큐처럼 일상의 한 장면을 따라간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친밀함 위에 차갑고 단단한 질문을 숨겨둔다. “과연 이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가?” 테이블에 모인 7명의 친구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함께 늙어가는 동료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 속엔 ‘관계의 가면’이 감춰져 있다. 정체는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오는 문자·전화·알림을 모두 공개하자는 단순한 규칙. 그 제안은 처음엔 장난처럼 보인다. “우린 숨길 게 없는 사이잖아.” 하지만 그 말 자체가 이미 관계가 허위라는 증거다. 관객은 이 게임이 무언가를 깨뜨릴 거라는 걸 안다. 그러나 인물들은 자신들의 ‘자신감’ 안에서 그 사실을 무시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감정의 첫 균열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갈등을 급격히 터뜨리지 않고, 침묵과 정적 속에서 서서히 끓여낸다는 점이다. 처음엔 문자 하나, 누군가의 표정 변화, 다른 누군가의 눈치 보기. 그 모든 게 관계 속 숨겨진 틈을 드러낸다. 웃음은 있지만 진짜 웃는 사람은 없다. 농담은 오가지만 그 속엔 무언의 긴장이 들어 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녁 식사’는 사실 관계의 지뢰밭이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 우리는 이들을 ‘가까운 사람들’로 보았다. 하지만 영화는 말한다. “가깝다고 해서, 진실하게 아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이라는 장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이건 현대 관계의 은밀한 금고다. 그 안에는 생각, 감정, 충동, 거짓, 비밀이 있다. 그걸 열자는 말은, 곧 관계의 모든 균형을 흔들자는 말과 같다. 게임이 시작되고, 메시지 하나가 공개된다. 그건 농담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곧 누군가의 표정이 굳는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이건 게임이 아니다’라는 걸 깨닫는다. 《완벽한 타인》은 이 첫 번째 균열을 웃음과 일상의 틈으로 녹여낸다. 그러나 그 틈은 곧 관계의 낭떠러지로 이어질 균열의 시작이다. 친밀해 보이던 부부, 허물없던 친구들, 모두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이 순간 조용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러난 민낯

게임은 계속된다. 휴대폰에 울리는 알림 하나가 어떤 부부에겐 작은 오해를, 또 다른 커플에겐 돌이킬 수 없는 폭로를 만든다. 《완벽한 타인》은 이 과정을 빠르게 몰아가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의 시선, 정지된 표정, 조용한 침묵으로 관계의 민낯이 벗겨지는 순간을 정밀하게 따라간다. 처음엔 가벼운 거짓말들이다. 다른 이름으로 저장된 사람, ‘회의 중’이라며 감춘 전화, 아이를 빌미로 만들어낸 작은 변명. 그러나 이 작은 균열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인물들은 각자의 방어선을 잃기 시작한다. 게임의 중반부, 하나의 결정적 메시지가 공개된다. 그 메시지는 친구가 친구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지 못한 진심 또는 숨겨온 이면을 드러낸다. 이때부터 영화는 웃음을 지워간다. 처음의 농담은 사라지고, 테이블 위엔 감정의 침묵이 흐른다. 누군가는 의심하고,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숨기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 덮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을 덧칠한다. 관객은 이 장면들을 보며 ‘이건 영화지만 너무 현실 같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건드리는 건 거대한 배신이 아니라, 일상 속 누구나 갖고 있는 숨김과 거리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하게 와닿는 건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직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무거운 것이 아니라, 그걸 감당할 관계가 없을 때 파괴력을 갖는다. 이 영화의 감정 구조는 감정이 ‘쌓이는’ 게 아니라 감정이 ‘벗겨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속내가 드러날수록 가까워져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를 멀리하게 된다. 게임은 결국 인물들의 자기 고백과 자기 보호 본능을 동시에 자극한다. 친구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누군가는 그를 이해하고, 누군가는 그를 거부한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은 무너진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누군가의 정체가 드러나는 시점이다. 그 순간 관객은 ‘이 사람이 왜 숨겼는지’를 이해하면서도 그 사실이 왜 파괴적인지 동시에 받아들인다. 이 감정의 이중성은 영화 전체를 불편하게, 그러나 진실되게 만든다. 《완벽한 타인》은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 반드시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말한다. 오히려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유지되던 관계의 균형이 진실 때문에 무너진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우리 솔직해지자.” 그러나 이 영화는 되묻는다. “그 솔직함을 정말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끝내 남겨진 거리

게임은 끝이 난다. 휴대폰은 다시 주머니로 들어가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완벽한 타인》은 그 일상이 더 이상 ‘전과 같은 일상’이 아님을 알려준다. 한 번 드러난 진실은, 결코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하나의 반전처럼 보인다. 우리가 보아온 모든 폭로와 갈등은 ‘만약’이라는 가정 위에서 펼쳐진 시뮬레이션이었다. 실제로는 게임이 시작되지 않았고, 휴대폰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이 반전은 반전 그 자체보다 "왜 그 시뮬레이션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누구도 완전히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누구나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죄책감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고, 혹은 단순한 피로함일 수도 있다. 영화는 말한다. “진실은 항상 선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거짓과 은폐라는 얇은 막 속에서 관계를 간신히 유지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게임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공유한 불안과 긴장은 실제로 존재한 감정이다.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다시 덮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덮인 감정은 ‘거리’라는 형태로 남는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모든 걸 말하지 못하고, 어쩌면 말하지 않아야 지켜지는 관계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결국 영화는 감정적으로 묻는다. “완벽한 타인은 누구인가?” 그건 모르는 사람일까, 아니면 너무 잘 알아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일까? 《완벽한 타인》의 진짜 결말은 ‘드러난 진실’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었던 진실’이다. 그 진실이 밝혀졌다면, 지금의 웃음도, 관계도, 식사도 모두 산산조각 났을지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사람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그들은 전보다 더 멀어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들이 쌓이고, 그것이 감정의 벽이 되어 우리는 결국 서로 가장 가까운 타인이 된다. 《완벽한 타인》은 웃으며 시작했지만, 침묵으로 끝난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만 어쩌면 가장 솔직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