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이 캔 스피크 리뷰: 웃음 뒤의 진심, 꺾이지 않은 용기, 끝내 울리는 말

by 안다미로_ 2025. 5. 20.

아이 캔 스피크 썸네일

웃음 뒤의 진심

《아이 캔 스피크》는 처음부터 유쾌하다. 도시 곳곳의 민원 현장에 등장하는 ‘옥분 할머니’(나문희 분)는 불합리한 관행과 규제에 꼬박꼬박 항의 전화를 걸고, 무엇이든 영어로 말하려 애쓰며 공무원들에게는 ‘골칫덩이’로 통한다. 그러나 관객은 곧 알게 된다. 그 웃음은 단지 코미디가 아니라, 감정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영화의 전반부는 전형적인 코믹 설정으로 구성된다. 원칙주의자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와 무한 민원 제기자 옥분.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인 갈등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단순한 ‘불만자 vs 공무원’ 구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확장된다. 옥분은 왜 그렇게 영어를 배우고 싶어할까? 왜 그렇게 매사에 집요할 정도로 정확함을 요구할까? 영화는 이 질문에 서둘러 답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말투, 표정,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 그 진짜 이유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 방식이 탁월한 이유는, 감정의 진실을 너무 이르게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제되고, 웃음은 그 위에 얹혀 있다. 그러다 보니 옥분이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틀린 영어를 연습하고, 정장 차림으로 학원을 찾아가는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눈물의 전조처럼 작동한다. 민재는 처음엔 옥분을 단순한 ‘불편한 민원인’으로 여긴다. 하지만 옥분의 태도와 끈기, 그리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있다는 걸 느끼면서 점차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그 과정은 관객 역시 옥분을 단순한 코미디 캐릭터에서 진짜 인간으로 인식하는 변화의 경험과 일치한다. 《아이 캔 스피크》의 전반부는 가볍게 흘러가지만, 그 가벼움 속에 감정의 진폭이 심는다. 그리고 관객은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 사람은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단순한 영어가 아니라, 지금껏 말하지 못한 ‘진짜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유머’를 도구로 쓰되, 그 유머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사 한 줄, 행동 하나, 그리고 작은 표정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결국 이 챕터의 핵심은,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가 진실을 전하려는 사람임을 설득하는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는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실의 무게를 더 깊고 절절하게 만든다. 옥분은 단지 웃긴 사람이 아니라, 끝내 말해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 시작이 영어였고, 그 웃음 뒤에는 말하지 못한 과거의 무게가 있었다.

꺾이지 않은 용기

《아이 캔 스피크》가 진짜 감정을 건드리는 건, 바로 중반부 이후, 옥분이 왜 영어를 배워야만 했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동안 반복되던 유머는 그 자체로 감정의 전조였고, 그 웃음 뒤에는 말하지 못한 참혹한 과거가 있었다. 옥분은 위안부 피해자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 세계 앞에서 직접 말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통역을 쓰면 되지 않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옥분이 영어를 고집한 이유는 단 하나다. “누구의 입도 아닌, 내 입으로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말 한 마디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건, 존엄의 선언이다. 이 선언은 그동안 그녀가 견뎌온 수치, 그로 인해 잃어버린 세월, 그리고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사회적 침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자 회복의 첫걸음이다. 민재는 이때부터 옥분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더 이상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진실을 위한 동행자가 된다. 영화는 이 관계의 전환을 과장된 서사 없이 조용히 보여준다. 민재는 묻지 않는다. 그는 대신 들어주고, 기다리고, 옥분이 자신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준다. 여기서 영화는 ‘증언’이라는 행위가 단지 과거를 말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증언은 감정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말하는 순간, 그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자신의 삶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옥분은 영어를 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한 단어 한 단어에 모든 인생을 실어 말한다. 그 떨리는 문장 하나하나가 단지 말이 아니라, 울림이며 용기다. 그리고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그 어떤 장면보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군중은 숨죽이고, 통역사는 멈춘다. 마이크 앞의 작은 노인은 마침내 ‘그날의 자신’을 대신하여 말을 꺼낸다. "I am a victim..." 이 문장은 단지 고백이 아니다. 이건 사회를 향한 고발이자, 세대를 향한 요청이며, 스스로를 향한 회복의 시작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이 모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눈물도, 연민도, 정의도 강하게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말한다.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로 살아낸 사람이다.”

끝내 울리는 말

《아이 캔 스피크》의 마지막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그 어떤 폭발적인 장면 없이, 단지 ‘말하는 사람’의 얼굴만으로 영화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옥분이 미 의회 청문회에서 직접 자신의 피해 경험을 영어로 증언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유창한 발음을 하지 못하고, 문장을 더듬는다. 하지만 그 말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 감정의 응축이다. 더 이상 번역된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내뱉는 말. “I am a victim... but I am also a survivor.” 이 문장은 단순한 정의 진술이 아니다. 그건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며, 과거를 고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건 ‘무엇을 말했는가’보다도 ‘누가 말했는가’이다. 그동안 수많은 위안부 관련 영화와 다큐가 대신 말해주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말하게 만드는 영화다. 주인공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화자이고, 화자이기에 주체다. 그녀는 더 이상 설명당하거나 해석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한다. 이 장면 이후,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다. 그건 말이 주는 감정의 무게이며, ‘말하지 못했던 시대’에 대한 애도이자,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시대’에 대한 기원이다. 민재는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이 장면은 마치 세대와 세대가 말을 통해 감정적으로 연대하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끝난다.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일.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연대의 형태다. 《아이 캔 스피크》는 말한다.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이야기도 아직 진행 중이지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 사람을 응원할 수 있다고. 옥분은 이제 그저 민원을 넣는 할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세상에 말을 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들을 준비가 된 사람으로 바뀐다. 영화는 이 변화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고통을 견딘 사람은 강하다. 그러나 고통을 말한 사람은 더 강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옥분은 청문회장을 나와 햇빛이 비치는 길을 걷는다. 그 길은 혼자이지만, 이제 그녀는 외롭지 않다. 말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관객의 가슴에 오래 남아 끝내 울리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