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소공녀 리뷰: 남지 않은 집, 지켜낸 것들, 잊히지 않는 이름

by 안다미로_ 2025. 5. 19.

소공녀 썸네일

남지 않은 집

《소공녀》는 집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집을 포기한 사람’의 이야기다. 주인공 미소는 하우스메이트도, 전세 계약도, 반지하 월세방도 아닌 스스로 집이라는 공간을 떠나기로 선택한다. 그 선택은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지키고 싶은 ‘자기만의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지붕’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삶의 사소한 즐거움—하루 한 잔의 위스키, 담배 한 개비의 여유—그 감각들을 지키는 걸 선택한다. 영화는 이 순간부터 ‘소유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는 것들’과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조용히 펼쳐낸다. 미소는 보증금이 오르고 월세가 감당되지 않자 가장 먼저 “이 집을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겐 과연 집이 어떤 의미였을까?” 《소공녀》의 집은 단지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니다. 그건 사회가 요구하는 안정성의 상징이고, 일상에서의 생존보다 훨씬 더 무거운 ‘정상성의 허상’이기도 하다. 미소는 그 집을 포기하면서, 단순히 공간을 비운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감수한 것이다. 친구들은 그녀를 걱정하고, 몇몇은 안쓰러워하고, 어떤 이는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위스키와 담배가 지켜질 수 있는 조건’이 곧 삶의 품위이자, 자존의 증명이다. 영화는 이 ‘집 없음’을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고, 조용하며, 때론 아름답기까지 하다. 미소는 매일 다른 친구 집을 전전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의 공간에 머무를지언정, 자신의 기준엔 침범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녀가 이불을 펴는 장면, 조용히 앉아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 그리고 그 침묵을 견디는 시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한다. 그 순간들엔 ‘가진 것 없음’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삶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소공녀》의 위대함은 그 집 없는 삶을 ‘패배’로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오히려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은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자기만의 ‘우선순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지켜낸 것들

《소공녀》의 가장 큰 반전은, ‘잃은 것’이 많은 삶 속에서도 미소는 꽤 많은 것을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집을 포기했고, 고정된 일자리도 포기했다. 밤마다 잠잘 곳을 찾아야 하고, 누군가의 집에 조심스레 발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감각, 기호, 존엄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게 바로 미소라는 인물을 이 영화의 중심에 단단히 세워주는 힘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스키와 담배다. 누군가에겐 사치일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겐 중독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것들이 미소에게는 삶의 ‘기본값’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그녀가 타인의 시선을 해명하지 않는 이유이자,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작은 깃발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절대 그것을 ‘도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조명한다. 미소는 각기 다른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며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관찰한다. 그들은 각자 어른이 되었고, 정착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안정’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 안정은 완전하지 않다. 누군가는 거대한 집에 살지만 외롭고, 누군가는 결혼했지만 마음 둘 곳이 없고, 누군가는 자녀를 돌보느라 자신을 잃었다. 반대로, 미소는 떠돌고 있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지만 고립되지 않고, 외로움은 있어도 비굴함은 없다. 그 차이는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된다. 미소는 타인의 규범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 살아간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미소가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정이 많은 인물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웃고, 힘든 친구에게는 살림을 도와주고, 때로는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다. 그녀의 삶은 작고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선명하게 존재한다. 《소공녀》는 여기서 질문을 다시 뒤집는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미소처럼 집이 없고 일정한 직장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면 매달 할부를 내며, 타인의 시선을 감당하느라 자신의 기호와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일까?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결과로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기준이 된다. 미소는 아주 작은 것들을 지켜냈다. 한 잔의 위스키, 한 개비의 담배, 누군가의 집에서의 따뜻한 눈빛, 그리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 그 소소한 것들이 결국, 그녀를 ‘소공녀’가 아닌 진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힘이다.

잊히지 않는 이름

《소공녀》의 마지막은 마치 흐린 오후의 바람처럼 조용히 스쳐 간다. 거대한 사건도 없고, 명쾌한 해답도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건 주인공 ‘미소’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어느새 관객 각자의 삶 속 어딘가에 닿아 있는 감정의 기표가 된다. 영화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을 정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묵묵히 길을 걷고, 잠시 어깨를 기대고, 그리고 다시 자신의 무게를 안고 일어난다. 이 엔딩은 어떤 면에선 허무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소공녀》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계속되지만, 모든 삶이 같은 방향을 향할 필요는 없다. 미소는 남들과 같은 방식의 행복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다. 그녀는 단지 “나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끊임없이 조율하고, 맞추고, 또 넘기며 살아갈 뿐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미소가 친구 집에서 나와 혼자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다. 배경엔 아무 음악도 없고, 어떤 대사도 없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 인물이 지닌 고독과 강인함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외롭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 고요함 속엔 자기 삶을 책임지는 태도가 담겨 있다. 영화는 미소의 이름처럼 ‘미소’ 지을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작게 웃고, 작게 버티며, 작게 앞으로 가는 수많은 청년들의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는 어느 세대의 상징도, 시대의 대표도 아니다. 그저 자기만의 기준으로 살아낸 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 ‘하나의 삶’이 가진 울림이 보편적인 공감으로 확장되는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그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소공녀》는 화려한 스코어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마지막에 단 하나의 인물을 우리 마음에 남긴다. 미소. 그 이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따금 우리 삶 속에도 등장한다. ‘나도 어쩌면 미소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을 통해. 그 이름은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처럼 흔들리고, 선택하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버리며 살아가니까.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공녀》는 수많은 거대한 영화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