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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리뷰: 가짜 계단, 진짜 냄새, 벗어나지 못한 집

by 안다미로_ 2025. 5. 19.

기생충 썸네일

가짜 계단

《기생충》은 ‘계단’으로 시작해 ‘지하’로 끝나는 영화다. 영화 속 모든 공간은 수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계단이라는 장치다. 하지만 이 계단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계단은 계급의 경계이며, 그 경계는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깊고 잔혹한 단절로 작동한다.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반’만 지상이다. 거리는 가까워 보여도, 빛의 각도부터 공기의 흐름까지 완전히 분리된 세계다. 우리가 처음 이 가족을 볼 때, 그들은 아래로 들어가는 계단을 내려간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이미 이 가족이 ‘밑에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고정한다. 그리고 이 집에는 유일하게 세상이 보이는 창문이 있다. 하지만 그 창문으로 보이는 건 취객의 소변, 쓰레기, 거리의 먼지뿐이다. 즉, 창문은 ‘세상과의 연결’이 아니라, 아랫세상이 위의 세상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오염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창이다. 영화 속 계단은 단 한 번도 진짜로 '올라갈 수 있는 길'로 작동하지 않는다. 기우가 박사장 집에 가기 위해 오르는 계단은, 실제로는 그 계급에 편입되기 위한 위장이자 거짓말의 길이다. 그가 위로 올라갈수록, 그의 말투는 바뀌고, 표정은 경직되며,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이 된다. 이처럼 《기생충》은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구조적으로 비튼다. 즉, 위로 올라가려면 본래의 자신을 감춰야 하고,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구조 안에서 여전히 계단 아래에 속한 존재로 남는다. 특히 영화 후반부, 폭우가 쏟아진 밤에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에서 탈출해 연속적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그 어떤 액션 장면보다 강렬한 감정적 내리막이다. 그 장면은 그냥 '도망치는 장면'이 아니다. 그건 계급의 환상이 무너지고, 임시로 올라섰던 위장된 위치에서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아래로 향하고, 인물들의 어깨는 젖고, 숨은 차오르고, 그 모든 동선이 하나의 메시지를 만든다: “우리는 결국 내려간다.” 《기생충》은 물리적 공간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정밀하게 구조화한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그건 ‘희망을 흉내 낼 수 있는 구조 안에 살고 있다’는 착각이다. 그리고 그 착각은 박사장네 계단 밑 지하실에서 더 깊은 절망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말한다. “계단은 있지만, 계단 위에 설 수는 없다.” 기택 가족은 오를 수는 있었지만,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 계단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계단이 이어주는 위의 세계는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진짜 냄새

《기생충》에서 ‘냄새’는 단지 후각의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냄새는 계급을 감지하는 무언의 언어이자, 사회적 거리감을 시각보다 더 날카롭게 전달하는 감각 장치다. 말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 냄새는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고, 특정한 공간을 고정하며, 나아가 존재 자체를 구별하는 신호로 작동한다. 박사장의 가족은 한결같이 기택의 냄새를 언급한다. 그것은 결코 노골적인 악의나 비난의 어조는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내뱉어지고, 그 안에는 차이가 아닌 '차별'이 담겨 있다. “지하철 냄새 같아”, “계피랑 걸레 냄새가 섞인 것 같아”라는 대사는 그저 향의 묘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는 공간, 걷는 거리, 사용하는 비누의 가격까지 함축한 표현이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이 냄새가 관객에게 실제로 맡겨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 냄새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은 냄새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표정, 고개 돌리는 타이밍,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택의 얼굴을 통해 관객 스스로 그 거리감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특히 중요한 장면은 생일파티 당일, 기택이 텐트 뒤편에서 숨어있을 때, 박사장이 “선을 넘지는 않아, 근데 냄새는...”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박사장은 선을 지킨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선은 이미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넘지 못할 벽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말이 기택의 얼굴을 무너뜨린다. 그는 더는 웃지 않는다. 그의 감정은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뒤집어진다. 이 냄새는 더 이상 감각이 아니라 인격의 경계선이 된다. 기생충의 냄새는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 아무리 샤워를 해도, 다른 비누를 써도, 그 냄새는 ‘밑에 사는 사람’이라는 본질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그 냄새는 곧 사회적으로 박힌 ‘낙인’이자, 누군가의 존재가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말 없이 드러내는 방식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냄새라는 코드를 통해 현대 사회의 진짜 차별은 혐오나 배제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은근한 불쾌감의 공유임을 말한다. 냄새는 대놓고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불쾌한데 정확히 왜 그런지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분류하고 거리 둔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 냄새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가?” 《기생충》의 냄새는 그래서 더 잔인하다. 그건 스스로도 인식하게 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기택은 스스로 냄새를 맡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우리 모두 같은 냄새가 나는구나.” 그 말은 절망이면서도 자각이다. 그들은 계층이 아니라 ‘기층’이라는 것을 냄새로 자각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향해 가장 잔혹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벗어나지 못한 집

《기생충》의 마지막은 차분하지만 치명적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반전을 의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평온한 이미지 안에 가장 깊은 절망을 숨긴다. 그리고 그 절망은 바로 ‘집’이라는 공간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기택은 지하실로 내려간다. 더 이상 반지하도 아닌, 그보다 더 밑으로. 이 지하실은 곽새로의 가족이 숨어 살던 장소였지만, 결국 기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역할 교체가 아니다. 이 장면은 계층 구조 안에서 계승되는 고통의 반복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는 서로를 밀어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결국은 같은 자리에 돌아온다’는 메시지가 조용하게 침투해 있다. 기우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꾸고자 한다. 그는 편지를 쓴다. 부자가 되어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더 이상 반지하가 아닌 진짜 집을 사겠다고 다짐한다. 이 장면은 기우의 꿈이자 계획이고, 동시에 환상이다. 감독은 여기서 관객에게 잠시 희망을 제공한다. 따뜻한 햇살, 열린 창, 아버지와의 재회—하지만 그 모든 장면이 끝난 뒤, 기우는 다시 반지하 집에 앉아 있다. 이 전환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오히려 잔인하다. 《기생충》은 대놓고 희망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이게 진짜였기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기우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기택은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 했다. 하지만 결국 둘 다 ‘집’이라는 구조 속에서 다시 갇힌다. 이 영화에서 ‘집’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건 계층을 규정하고, 이동을 제한하고, 감정을 고립시키는 사회적 장치다. 그리고 그 집은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 박사장네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그곳의 계단은 여전히 깨끗하며, 지하실 문은 여전히 잠겨 있다. 무언가가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기생충》은 마지막까지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정말 위로 올라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이 사회에선 사치일지도 모른다. 기우는 다시 펜을 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다시 그 편지를 썼다는 걸, 그 편지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기생충》의 결말은 슬프지 않다. 오히려 담담하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 현실이 바로,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강력한 공포다. “계단은 있지만,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기생충》은 그 말을,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가장 조용하게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