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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무너진 일상, 뒤틀린 자아, 광기의 탄생

by 안다미로_ 2025. 6. 18.

조커 썸네일

조커 : 무너진 일상

어떤 하루는 유난히 무너져 보인다. 날씨가 흐리거나, 사람들의 표정이 차갑거나, 아니면 내면에서 무언가 스르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무너지는 감정’에서 시작된다. 한 남자의 일상은 이미 깨져 있었고, 사회는 그 틈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방치했다. 아니,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주인공은 평범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하지도 않다. 그는 광대 분장을 하고 거리로 나가고, 가끔은 병원에서 심리 상담을 받으며 복용 중인 약을 의지 삼아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웃음을 잃어버린 삶을 산다. 혼자 사는 집, 병든 어머니, 쌓여만 가는 가난, 불안정한 고용. 이 모든 요소들이 그를 점점 외딴섬으로 밀어낸다.

세상은 말한다. “노력하면 나아질 거야.” 하지만 그의 세계에서는 그 말조차 사치다. 웃는 얼굴 뒤엔 수없이 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고, 그 감정들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리 상담을 받지만 그마저도 예산 삭감으로 중단된다. 약물 복용도 끊긴다. 그가 의지하던 몇 안 되는 기둥이 하나씩 사라지며, 주인공의 내면은 점점 붕괴되어 간다.

이 작품은 그러한 붕괴를 빠르고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천히, 조금씩 균열이 퍼져 나가듯 전개된다. 마치 시멘트 벽에 금이 가듯, 주인공의 마음도 현실의 무게에 조금씩 짓눌린다. 관객은 그 과정에 함께 놓이며, 그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끼게 된다. 처음엔 불안했고, 이후엔 슬펐고, 점점 무표정해진다.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회는 무심하다. 그는 거리에서 폭행을 당해도 관심받지 못하고, 웃음을 통제할 수 없는 병 때문에 오해받는다. 한 번도 진심으로 이해받은 적 없는 삶 속에서, 그는 점점 자신만의 ‘진실’을 믿게 된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규칙을 만든다. 그리고 그 규칙은 일반적인 윤리나 상식과는 점점 멀어진다.

이야기 초반, 주인공은 자신이 개그맨이 되기를 꿈꾼다.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는 그 목표는 어쩌면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는 외면당하고, 희롱의 대상이 된다. 조롱은 희망을 조각낸다. 웃기고 싶다는 꿈은 ‘웃음거리’가 되는 현실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철저히 외면받아 왔는지를 체감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된다.

감정적으로 이 작품은 매우 무겁고도 밀도 있다. 하나하나의 장면은 극적인 파열음을 내지 않지만, 축적되는 무게감은 점차 관객을 압도한다. 소음 가득한 도시, 차갑고 삭막한 거리,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에서 그는 점점 잊혀진다. 누군가에겐 배경에 불과한 그가, 이 작품에서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마침내 외친다. “나도 여기 있다고.”

‘무너진 일상’은 단지 주인공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사는 세상 속 균열의 비유이기도 하다. 그는 약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취급을 당해온 보통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어쩌면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비극이 무섭고 슬픈 이유는 바로 그 보편성 때문이다.

뒤틀린 자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정의하려 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비춰지는 모습이 아닌,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정체성으로서의 ‘나’를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때로는 외부의 말과 행동이 그 정체성을 흔들고 왜곡시킨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바로 그런 경우다. 본인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조차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왜곡된 이미지를 강요받는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희생자였다. 가난한 환경과 불안정한 가정 속에서 자라며, 정서적으로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진실을 차츰 알아가게 된다. 믿어왔던 어머니의 이야기조차 허구에 가까웠으며, 자신의 과거 역시 미화된 기억일 뿐이라는 사실은 그를 철저히 혼란스럽게 만든다. 자아란 단순히 현재의 감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위에 쌓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진실은 곧 그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폭탄이 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서서히 기존의 자신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더는 평범한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점점 낯선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그 안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뒤틀림’의 시작이다. 자신이 그동안 억눌러온 감정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그로 인해 오히려 정체성을 찾았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은 더 큰 폭력과 광기로 이어지고, 관객은 그 변화를 지켜보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 영화는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을 주인공의 시선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그는 점차 이름이 아닌 ‘상징’이 되어간다. 이름을 잃는다는 건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를 잃는 것이며, 동시에 개인으로서의 ‘자기’도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누구의 이름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 누구의 시선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는 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제공한다.

심리적으로 이 영화는 복잡하고 치밀한 흐름을 따라간다. 현실의 외면 속에서 인물은 점점 환상과 망상의 경계에 선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고, 관객은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이 과연 진실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 불확실성은 이 작품을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주인공의 내면과 동일선상에 놓이게 만든다. 그의 내면 세계는 불완전하고 깨져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그것이 현실을 더 생생하게 비춘다.

‘조커’라는 상징은 단순히 광대의 분장을 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사회의 균열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자아다. 웃음과 광기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자신을 조롱하던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 선다. 그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고, 체제를 흔드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이 변화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에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자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타인의 말, 경험, 감정, 상처가 모두 쌓여 하나의 인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인물이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을 때, 그 자아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악’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무관심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던진다.

주인공은 마침내 ‘조커’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세상이 준 이름이자,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이다. 그 이름 속엔 더 이상 웃기고 싶은 마음도, 이해받고 싶은 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를 파괴했던 세계를 비웃는 냉소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냉소 속에서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행복해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광기의 탄생

폭풍은 한순간에 몰아치지 않는다. 서서히 구름이 끼고,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방향을 바꾼다. 이 영화에서 광기의 시작도 그렇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이해받고 싶었고, 웃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모든 욕구가 무시되고 조롱당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정상’이라는 경계를 서서히 떠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선을 넘는다. 그것이 바로 광기의 탄생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애초에 모호하다. 이 작품은 그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이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왜 이해받지 못하는가. 주인공은 점점 자신의 행위에 이유를 부여한다. 그것이 폭력이든, 범죄든 그는 자신만의 논리 속에서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 논리는 단지 착각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경험과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다. 가면을 쓴 채 살아왔던 시간이 길었기에, 그것을 벗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탈피가 시작되면, 그 움직임은 빠르다. 분장은 더 이상 직업적인 상징이 아니라, 정체성의 표식이 된다. 그는 이제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웃지 않는다. 스스로가 웃음을 결정하며, 그 웃음은 공포로 뒤바뀐다. 관객은 그의 얼굴이 아닌, 그의 눈빛에서 진짜 공포를 느낀다.

중요한 장면 하나는 그가 대중 앞에 서는 순간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정체성의 발현이자, 사회 전체를 향한 도전이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는 새로운 ‘자신’을 선언하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무대 위에서 이뤄지는 그의 퍼포먼스는 단순한 광기라기보다, 억눌림과 고통의 집합체가 터져 나오는 절정이다. 거기에는 분노와 슬픔, 좌절과 자조가 뒤섞여 있다.

이 영화는 ‘악’의 기원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악하지 않았다. 주변이 그를 외면했고, 체계는 그를 이해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조롱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뒤엉켜 하나의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그의 광기는 한 인간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시대와 환경의 산물처럼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섬뜩한 이유다.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거리에는 불이 붙는다. 개인의 고통이 사회의 균열과 맞닿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의 선택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들은 마치 사회의 억눌린 목소리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그가 있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징이 된다.

관객은 그의 행위를 응원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동정도, 비판도, 공감도 아닌, 그저 ‘이해’하는 감정. 그것이 가장 무서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외부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광기의 탄생은 누군가의 실패가 아닌, 모두의 방관으로 완성된다. 그는 괴물이 되길 원한 적 없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자신을 그에 맞춰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완전해졌고,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랐다.

이 영화는 그렇게 묻는다. ‘만약 그를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이해해줬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그 질문은 스크린 너머로 향한다. 지금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무너지고 있는 이웃들에게 그 물음을 던지게 한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끝나지만, 생각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