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 버려진 임무
이 영화는 단 한 줄의 뉴스 기사에서 시작된 영화다. “국가가 만든 부대, 그러나 존재조차 부정된 이들.” 영화는 그 단순한 문장 뒤에 숨어 있던 엄청난 국가폭력과 인간의 비극을 감정적으로 응축한 실화 기반 드라마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1.21 사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북파 암살조직을 극비리에 창설한다. 그 이름, 684부대. 이들은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실미도라는 외딴섬에 격리되어 혹독한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누구였는가 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다. 대부분은 사형수, 무기수, 사회 부적응자, 밑바닥 인생들. 나라가 이들을 불러낸 이유는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쓸모없이 죽어도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 부대의 탄생부터 국가가 인간을 어떻게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버리는지를 철저히 감정적으로 파고든다. 처음 섬에 끌려온 이들은 말한다. “죽기를 각오하면 자유를 주겠다.” 그러나 곧 그 말이 자유가 아닌 절망의 시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도관(설경구)은 명령에 충실한 훈련 책임자다. 처음엔 감정 없이 부대를 이끈다. 그러나 그 역시 점점 이 임무의 실체를 알게 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은 국가의 명분과 인간의 삶 사이에서 갈라지는 균열을 상징한다. 684부대는 실체가 없다. 서류도 없고, 기록도 없다.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고, 존재는 국가의 입장에서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살아도, 죽어도 기록되지 않을 존재. 이것이 이 이야기가 다루는 첫 번째 감정의 층이다. “당신은 없던 사람입니다.” 영화 초반은 특수부대 영화처럼 흘러간다. 거칠고 강렬하며, 폭력적인 훈련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 훈련의 목적이 국가를 위한 ‘기술 향상’이 아닌, 인간을 완전히 말살하고 목적만 남기려는 세뇌 과정임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점점 장르를 바꾼다. 해당 작품은 묻는다.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하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은 “나라가 널 사람으로 봤는가?” 그리고 이 질문이, 감정적 분노의 뿌리를 만든다. 684부대의 시작은 이념도 명분도 아닌, 복수라는 감정에 포장된 체제의 욕망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훈련받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버려질 준비가 되어 있는 몸들이었다. 이 챕터는 단지 ‘비극의 배경’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엄이 어떤 시스템 안에서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감정적 도입부다.
무너진 인간성
이 영화의 중반은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더 무겁고, 그 어떤 감정 영화보다 더 잔인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살기 위해 충성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충성하기 위해 인간성을 버려야 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684부대는 매일 지옥을 반복한다. 칼날 훈련, 폭력적 체벌, 식량은 부족하고, 언어는 금지된다. 이곳엔 감정도, 이름도 없다. 오직 번호와 명령만 존재하는 세계. 이들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삶을 위한 필사적인 적응과 스스로를 잊어야만 버틸 수 있는 침묵이 가득하다. 지도관(설경구)은 처음엔 그 침묵을 강요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시 인간임을 잊지 못한다. 병사들과의 유대, 그리고 반복되는 죽음 앞에서 그의 눈빛은 흔들린다. 이 영화는 이 지점에서 가해자조차 구조 안에서 희생자일 수 있다는 감정의 아이러니를 꺼낸다. 지도관은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러나 그 명령은 인간을 기능으로 만들라는 것이고, 기능이 다하면 제거하라는 시스템이다. 684부 대원들은 서로에게도 무감하다. 처음엔 갈등하고 다투지만, 곧 서로를 지탱하는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밖엔 아무도 없고, 이 지옥을 견딜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감정적 연대를 국가에 의해 무너뜨린다. 명령이 떨어진다. “해산할 수 없다. 정권 교체로 인해 작전은 폐기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암묵적 지시. “정리하라.” 바로 이 장면에서 이 이야기는 전환된다. 그동안 견뎌온 고통이 이젠 무의미했음을, 국가는 이들을 철저히 ‘없애려 한다’는 절망이 드러난다. 그 순간, 인간성은 부활한다. 그들은 드디어 저항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이제 죽어야 하는 이유조차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그 선택을 단순한 폭동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살기 위해 선택한 반역”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마지막 인간적 행동”이다. 지도관의 고뇌도 여기서 깊어진다. 그는 이들을 군인으로 키웠고, 이제는 그들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침묵하지만, 관객은 안다. 그 역시 구조 속에서 양심과 명령 사이에서 찢기고 있음을. 이 작품의 이 장면들은 화려하지 않다. 슬로모션도 없고, 음악도 자제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 건조함 속에서 더 날카롭게 감정이 전해진다. 이 챕터는 폭발 직전의 정적과 같다. 버텨왔던 고통이 한계에 이르고, 인간으로서 마지막 선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예고편이다.
끝내 터진 분노
이 스토리의 결말은 무겁고, 고요하고, 그래서 더 아프다. 이 영화는 수많은 전쟁 영화처럼 승리를 외치지 않는다. 그저 한 번의 폭발을 통해, 세상에 존재했던 이름들을 남긴다. 작전이 폐기되고, 684부대는 ‘제거 대상’이 된다. 죽을 만큼 훈련받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 어떤 대의도 따랐지만, 이젠 버림받은 존재. 이들은 묻는다. “왜 우리를 없애려 하느냐.” 그 질문에 어느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대신 돌아오는 건 사살 명령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움직인다. 군 기지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서울로 향한다. 그들은 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잊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한다. 버스를 납치하고, 한복판을 질주하며, 그들은 방송국 앞에서 멈춘다. 왜냐하면 단 한 번이라도 “우리는 있었다”는 말을 남기기 위해서다. 영화의 이 마지막 20분은 슬프도록 고요한 감정 폭발이다. 그 누구도 이들을 이해하지 않고, 그 누구도 이들을 막아선다. 결국, 한 명씩 쓰러지고, 목숨을 끊고, 그리고 사라진다. 지도관은 끝내 총을 겨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명령을 따르는 군인의 표정이 없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부대에 자신이 사과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총을 든다. 버스 안에서 마지막 남은 병사가 말한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싸운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한 문장이 해당 작품이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결국 단 한 가지 질문으로 끝난다. “국가는 인간을 버릴 수 있는가?” 그리고 “국가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사람이 국가에 의해 지워질 수 있는가?” 답은 없다. 하지만 영화는 침묵이 답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발의 총성, 한 번의 폭발, 그리고 침묵 속에 남겨진 이름 없는 무덤들로 끝난다. 관객은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잊지 못한다. 그들의 선택이 정당했는가 보다 그들이 왜 거기까지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감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다루지만 단순한 고발이 아니다. 그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한 시대에, 존엄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선택을 감정으로 기록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