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부산행: 달리는 공포, 흔들리는 인간성, 끝내 남은 감정

by 안다미로_ 2025. 5. 24.

부산행 썸네일

부산행 : 달리는 공포

이 영화는 단순한 좀비물이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포는 피와 살점이 아니라, 닫힌 공간 안에서 점점 좁아지는 생존의 선택지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공포를 넘어서 감정적인 압박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작은 평범하다.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딸 수안(김수안)을 데리고 KTX를 탄다. 목적지는 부산. 하지만 기차가 출발하는 그 순간, 뒤에서 열린 하나의 문으로 공포가 뛰어든다. 좀비는 ‘감염자’로 불리며 전통적인 서양 좀비와는 다르게 빠르고, 날렵하며, 극도로 본능적이다. 그리고 이 존재들이 기차라는 ‘움직이는 폐쇄 공간’ 안에 들어오면서  이 작품만의 독자적인 장르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장치는 공간의 제한성이다. 도망칠 수 없다. 기차는 달리고 있고, 열차 칸은 단절되어 있으며, 도시마다 감염은 확산되고 있다. 관객은 공포를 직접 느끼지 않아도 등장인물의 제한된 선택과 점점 좁아지는 여백을 통해 심리적으로 압박당한다. 이것이 해당 이야기가 감정적 공포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속도다. 좀비는 빠르게 달리고,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공포는 정지된 공포가 아니라, 계속 앞으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다. 이 구조는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한 형태였다. 해당 작품은 좀비라는 장르적 외피를 입었지만, 그 내부에는 한국 사회의 단면, 계급, 이기심, 연결된 가족 관계가 하나씩 깔려 있다. 1호차부터 15호차까지의 거리,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인물군은 축소된 사회 구조의 은유다. 학생, 회사원, 부녀자, 노인, 노동자, 어린아이. 각 인물들은 좀비보다 무서운 존재로 점차 변화한다. 그건 바로 ‘공포 상황 속 인간의 본성’이다. 해당 영화는 이 위기를 빠르게 설명하지 않는다. 뉴스는 단편적이고, 정보는 불완전하다. 그리고 관객은 그 불확실성 속에서 등장인물의 선택을 감정적으로 따라가게 된다. 이 챕터는 공포영화로서의 서사를 넘어 ‘감정이 탈출구를 잃는 상태’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도입부다. 기차는 달리고 있고, 공포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이 어느 칸에 타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흔들리는 인간성

이 영화가 탁월한 이유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개하기 때문이다. 열차가 멈추지 않고 달리는 동안, 공포는 점점 인간 사이로 파고든다. 초반에는 함께 달리고, 함께 피하지만, 위기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서로를 밀어내고, 닫고, 버리기 시작한다. 석우는 처음엔 딸 수안만 지키려 한다. 다른 사람은 관심 없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게 현실적 판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판단이 타인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결정이 된다. 한편, 산화하는 희생자들도 있다. 강력한 피지컬의 상화(마동석)는 임신한 아내 성경(정유미)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좀비를 막는다. 그는 가장 원초적이지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싸운다. 그의 선택은 ‘가족’이라는 작지만 단단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날카로운 건, 대중이 군중이 되었을 때의 잔인함을 그리는 방식이다.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나누고, 밖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기차칸 밖으로 몰아낸다. “그들도 감염됐을지 몰라.” 이성적 근거가 아닌, 공포에 근거한 배제. 그리고 그 배제는 한 명의 리더가 주도한다. 바로 ‘용석’(김의성)이다. 그는 자기만 살기 위해 모두를 설득하고, 거짓으로 위협을 조장하며 정당한 공포를 ‘이기적인 권리’로 바꿔버린다. 이 장면에서 해당 작품은 사회의 축소판이 된다. 약자를 내치고, 다름을 두려워하고, 안전을 이유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인간의 본능. 딸 수안은 이 상황을 바라보며 말한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해요?” 그 질문은 관객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이 챕터에서 관객은 공포보다도 인간의 선택과 본성에 더 깊이 불안해진다. 그리고 영화는 그 불안을 직설적으로, 감정적으로 흔들어댄다. 해당 스토리는 좀비가 중심에 있는 영화지만, 그건 단지 배경이다. 진짜 주제는 그 속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챕터는 그 질문을 가장 잔인하게, 가장 현실적으로 던지는 구간이다.

끝내 남은 감정

이 작품의 마지막은 화려한 탈출극도, 통쾌한 역전도 없다. 그저 조용히, 한 사람의 희생을 중심으로 감정이 흘러간다. 석우는 초반엔 이기적이었다. 자신의 딸조차 회사 일과 병행하며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마주한 수많은 죽음과 살아남기 위한 잔인한 선택들 속에서 그는 점점 사람이 되어간다. 상화가 죽고, 아이와 임산부가 위험에 처하고, 용석이 모두를 배신하는 순간, 석우는 선택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내가 희생하겠다.” 그의 감염은 영화의 절정이다. 관객은 예상하고 있지만 막상 그 장면에 도달하면 숨이 턱 막히는 슬픔이 밀려온다. 딸 수안을 품에 안고 마지막으로 안심시키며 그는 미소 짓는다. 그러고는 조용히 기차에서 몸을 던진다. 이 장면은 폭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어떤 액션보다 강하게 감정을 흔든다. 영화 부산행은 끝내 가족이라는 감정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좀비가 도시를 뒤덮고, 국가는 기능하지 않으며, 군인조차 민간인을 차단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성애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수안과 성경은 부산의 터널 앞에 도착한다. 총을 든 군인들이 조준하고 있지만 아이의 노래를 듣고 그들이 살아있음을 알아챈다. 바로 이 노래, “아리랑”은 이 영화의 감정적 결론이다. 그건 생존의 신호이자, 사람으로서 마지막 남은 감정의 목소리다. 이 영화 속에서는 공포 영화로 시작해 감정 드라마로 끝나는 작품이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건 힘이 센 자도, 많이 가진 자도 아니다. 끝까지 사람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말한다. “공포는 언젠가 지나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누굴 지켰는지는 기억에 남는다.” 그 기억은 기차처럼 끝없이 달린다. 그리고 그 감정은 관객 안에 오래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재밌게 본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좀비 드라마 및 영화는 정말 많이 봤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미국 드라마인 '워킹데드'에서의 좀비는 느리고 걷는 좀비였지만 부산행에서의 좀비는 신세계 그 자체였습니다. 좀비가 빠르게 달리고 공격성 또한 장난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콘셉트 때문인지는 몰라도 긴장감과 박진감이 넘쳤고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신파 부분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저에게 부산행은 좋은 감정으로 남은 좋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네요. 좀비물이나 스릴 있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꼭 추천드리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