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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리뷰: 보이지 않는 갈증, 퍼져가는 불안, 끝내 꺼지지 않는 불씨

by 안다미로_ 2025. 5. 21.

버닝 썸네일

보이지 않는 갈증

《버닝》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으로 시작된다. 감정은 있지만 명확하지 않고, 사건은 있지만 설명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끝까지 흐르는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결핍과 알 수 없는 갈증이다. 종수(유아인)는 평범한 청년이다. 지방에서 상경해 생계를 이어가며, 막연하게 소설가를 꿈꾼다. 그의 삶은 멈춰 있다. 목적도 방향도 불분명하다. 그런 그 앞에 해미(전종서)가 나타난다. 과거 동네 친구였던 그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겉으론 밝지만, 내면은 복잡한 공허감에 사로잡혀 있다. 영화는 해미의 대사 한 줄로 이 세계의 성격을 제시한다. “작은 굶주림과 큰 굶주림이 있다는 거 알아?” 이 문장은 《버닝》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다. 작은 굶주림은 생존의 문제지만, 큰 굶주림은 존재의 문제다. 지금 여기의 인물들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해 갈증을 느낀다. 종수는 해미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모호하다. 그는 그녀를 지켜보지만,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이들의 관계는 끊임없는 거리 유지로 구성된다. 해미는 한없이 가깝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너무 멀다. 종수는 그 간극을 메우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멀어진다. 그들의 재회는 마치 감정이 시작되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감정은 애초에 불완전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도, 공감도, 확신도 부족하다. 오직 결핍과 외로움, 그리고 막연한 갈망만이 존재한다. 해미는 여행을 떠나며 종수에게 고양이 밥을 부탁한다. 그러나 그 고양이는 종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의심하게 된다. 고양이는 정말 존재했는가? 해미는 정말 말한 그대로의 사람인가? 종수는 그녀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버닝》은 ‘사건’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사건을 둘러싼 감정의 퍼즐 조각들이다. 종수는 점점 해미를 향한 갈망에 몰입하고, 그의 내면에 쌓이는 건 애정이 아니라 갈증이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 그것이 종수의 감정을 뒤흔든다. 이 감정은 ‘표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억눌린다. 종수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묻고, 지켜보고, 의심할 뿐이다. 그 침묵이 쌓이며, 영화는 점점 감정의 불균형으로 미끄러진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벤’이라는 남자를 소개한다. 강렬한 미소, 부유한 생활, 여유로움. 벤(스티븐 연)은 종수와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이다. 종수는 벤을 보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을 본다. 그러나 벤은 해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감정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종수는 점점 해미와 벤 사이의 거리감, 자신이 놓인 경계의 외곽에서 혼자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갈증이다. 해소되지 않는 감정, 도달하지 못한 관계, 잡히지 않는 의미. 《버닝》의 첫 30분은 사건보다 감정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종수는 점점 더 목말라진다. 관객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감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는 갈증은 불길처럼 퍼지고 있다.

퍼져가는 불안

《버닝》의 중반 이후, 영화는 ‘사건’ 없이도 관객을 조이는 긴장감으로 몰아간다. 해미는 사라진다. 말 한 마디, 흔적 하나 없이. 그녀의 부재는 설명도, 고지도 없이 진행되며 극의 중심을 ‘종수의 심리’로 완전히 전환시킨다. 종수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해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집은 텅 비었고, 핸드폰도 꺼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은 아무렇지 않다. 누구도 그녀의 실종을 문제 삼지 않고, 그녀의 존재 자체를 모호하게 여긴다. 이제 해미는 종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지점부터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해미는 실제로 존재했는가? 그녀의 감정은 진짜였는가? 그녀가 사라진 건 벤 때문인가, 아니면... 종수 자신 때문인가? 영화는 어떤 것도 확언하지 않는다. 모든 건 단서처럼 보이는 감정 조각들일 뿐이다. 벤은 종수를 만나도 해미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한 말들로 종수의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 그 말은 은유일까, 자백일까?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종수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심리적으로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종수는 벤을 미행한다. 그의 집을 염탐하고, 그가 버린 여성용 소지품을 살핀다. 그러나 모든 건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는 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 확신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버닝》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으로 진실을 만든다. 종수가 느끼는 불안, 그 불안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자극하는 연출. 이 삼중 구조가 영화를 사건 중심이 아닌 감정 중심 미스터리로 만들어낸다. 종수는 점점 자신이 믿는 것 외에는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낀다. 그가 느끼는 불안은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번져간다. 벤의 침착함, 세상의 무관심, 해미의 침묵,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 이 모든 요소가 종수를 무너뜨린다. 해미는 부재하고, 벤은 설명하지 않으며, 종수는 의심한다. 이 삼각 구도는 단순한 인물 관계를 넘어서 존재의 불안, 감정의 정체성, 진실의 모호함을 보여준다. 종수는 더 이상 해미를 찾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내면이 말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 인정해주는 일이다. 《버닝》은 이 지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순간 증거보다 감정으로 진실을 만들고, 논리보다 불안으로 확신하는가를 묻는다. 관객은 종수를 따라 벤을 의심하고, 해미의 부재를 비극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영화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 그 불확실성은 감정이 진실을 대체해버린 세계를 의미한다. 《버닝》의 불안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스며들고, 퍼져간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제 종수뿐 아니라 관객의 내면까지 타고 번지기 시작한다.

끝내 꺼지지 않는 불씨

《버닝》은 끝까지 침묵한다. 해미의 행방은 끝내 드러나지 않고, 벤의 정체는 설명되지 않으며, 종수의 선택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감정만큼은 명확히 도달시킨다. 종수는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그는 확신한다. 벤이 해미를 해쳤고, 자신이 느낀 불안은 현실이었다고.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 진실을 증명하려 한다. 결국 종수는 벤을 만나 차 안에서 그를 칼로 찌른다. 불은 붙는다. 피로 물든 차는 타오르고, 벤의 시체는 태워진다. 진실은 불 속으로 사라진다. 이 장면은 명확한 해답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종수는 이 행동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만, 관객은 끝내 물음표를 안게 된다. 그는 정말 옳았는가? 해미는 정말 죽었는가? 벤은 진짜 살인자인가? 영화는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고, 관객의 해석만 남긴다. 《버닝》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 영화다. 이것은 추리극이 아닌 감정 구조의 퍼즐이다. 감정은 쌓이고, 확신은 증폭되며, 그 끝에서 한 인간은 폭발한다. 종수는 불을 지핀다. 그것은 복수인가, 구원인가, 아니면 증명인가. 그 어떤 말도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는 감정의 끝까지 도달했고, 그 감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단 사실이다. 《버닝》이 남긴 건 답이 아니라 불씨다. 의심은 남고, 감정은 맴돌며,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된다. 해미의 춤, 고양이의 부재, 벤의 무표정, 종수의 침묵. 이 모든 장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계속 타오른다. 우리는 종수처럼 불확실한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가끔은 그 불확실함이 진실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버닝》은 그 감정을 포착한다. 무언가를 정확히 정의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감정의 열기. 그리고 그 열기는 이 영화가 끝나도 꺼지지 않는다. 이것이 《버닝》의 마지막 말이다. “너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