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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리뷰: 두려움의 전장, 불가능한 전술, 꺾이지 않는 의지

by 안다미로_ 2025. 5. 21.

명량 썸네일

두려움의 전장

《명량》은 전투 장면 이전에, 두려움이 먼저 침투한 전장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명량 해전’은 12척의 조선 수군이 330여 척에 달하는 왜군을 상대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전투다. 그러나 영화는 이 승리의 영웅담보다, 그 승리를 이끌기 전까지의 두려움과 절망, 고립의 시간에 더 집중한다. 이순신 장군(최민식 분)은 3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하지만, 이미 군은 와해 직전이다. 한산도 대첩 이후 원균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은 사기가 무너졌고, 병사들은 도망가고, 수군 장수들조차 싸움을 회피하려 한다. 이순신이 마주한 건, 적이 아닌 아군의 두려움이었다. 영화 초반부는 조선의 내부 상태를 집요하게 묘사한다. 신뢰는 깨졌고, 명령은 무시되며, 심지어 백성들마저 이순신에게 의심과 원망을 보낸다. “전쟁은 지휘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이때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심리전’의 전장을 먼저 펼친다.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패배를 예감하고, 장수들은 살 길을 찾기 바쁘며, 왕조차도 그를 믿지 않는다. 이순신은 단지 외적인 적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내부를 상대해야 하는 전쟁을 시작하는 셈이다. ‘명량’은 단지 지리적 위치가 아니다. 그 이름에는 혼란, 조류, 예측 불가의 상징이 겹쳐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은 조선의 현실 자체다. 누구도 앞날을 내다볼 수 없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이순신은 다시 싸워야 한다. 무기가 아니라,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이 영화의 전반부가 특별한 이유는 그 어떤 전투보다도 ‘두려움의 정서’를 세밀하게 쌓아간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신중하지만 단호하고, 말은 적지만 그 속에는 철저히 통제된 분노와 고독이 담겨 있다. 그는 부하 장수들에게 절대 명령을 내리지만, 내면은 계속해서 질문한다. “이 싸움이 가능한가?” “내가 저들을 끌고 갈 수 있을까?” 영화는 이 내면의 균열을 인물의 시선과 정적인 침묵을 통해 그려낸다. 누군가는 이순신을 신처럼 믿지만, 다수는 그를 위험한 고집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모으는 일, 두려움의 구심점을 돌리는 일이다. 병사들의 두려움은 실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수가 부족하고, 기억은 패배로 가득 차 있으며, 전쟁의 공포를 몸으로 기억하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싸워야 한다”는 말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이순신은 말한다. “이 바다를 지켜야 한다.” 그 말은 단지 국가를 위한 것도, 왕을 위한 것도 아니다. 지켜야 할 이유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선언이다. 《명량》의 진짜 전장은 화살과 화포가 날아다니기 전에 사람의 믿음이 모이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순신은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 먼저 두려움을 마주하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불가능한 전술

《명량》의 가장 압도적인 순간은 실제로 전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단순히 ‘싸움’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준비한 것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전과 공간의 활용, 즉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전술이었다. 전장은 ‘명량 해협’. 좁고, 빠르고, 험한 조류로 유명한 이 바다를 이순신은 “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대”로 택한다. 왜군은 330여 척의 함선을 앞세운 대규모 함대. 조선은 단 12척. 누구도 이 전투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후퇴하지 않는다. 그는 물러서지 않기로 결단한다. 전술은 단순히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패배와 경험, 그리고 사람과 바다를 읽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해협의 조류, 배의 무게, 적의 전진 방식과 긴장 상태까지 계산한다. 전술이 아니라, 예감과 결단, 통찰이 맞물린 전장의 감각이다. 《명량》이 흥미로운 건, 영웅을 신격화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결정이 어떻게 불가능을 돌파하는지를 매우 현실적인 장면으로 설득한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신이 아니다. 그는 두렵고, 고립돼 있으며, 끝까지 혼자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물러서려는 그 순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자리를 택한다. 전투의 시작은 말 그대로 혼자서의 돌진이다. 12척 중 나머지 11척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순신의 판옥선만이, 명량의 급류를 향해 선두에 선다. 그가 외친 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단지 각오가 아닌, 사기와 전략이 결합된 전장의 언어다. 그 전술은 통했다. 좁은 해협의 조류는 왜군의 대형 전함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기동성과 거리 싸움에 능한 조선의 판옥선이 적의 전열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전투의 핵심은 물리적 승리보다도, 심리적 전환에 있다. 정지돼 있던 11척의 배들이 점차 이순신의 배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려움이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순신 혼자의 싸움이 수군 전체의 싸움으로 확장되는 전환점. 《명량》은 그 전환을 지휘가 아닌, 공감으로 이끌어낸다. 병사들은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순신의 “먼저 나아감”을 보았고, 그제서야 따를 수 있었다. 불가능한 전술이 성공한 건, 상황을 뒤집은 전략 때문만은 아니다. 그 전략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싸움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이긴 것이다. 《명량》은 그렇게 말한다.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라, 이기고 싶지 않은 싸움일 뿐이다.” 그 감정을 바꾼 사람만이 전술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꺾이지 않는 의지

《명량》의 마지막은 승리의 함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투는 끝났고, 수적으로 열세였던 조선 수군은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영화는 이 승리를 영웅의 훈장처럼 그리지 않는다. 대신, 이순신이 홀로 선 장면으로 돌아온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고독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은 단지 물리적 전투가 아니었다. 그건 신념과 의지, 믿음의 승부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자신을 향한 신뢰가 꺾이지 않도록 자신을 먼저 희생한 사람이다. 그가 싸운 건 적이 아니라 무너진 민심과 절망한 병사들, 그리고 침묵 속의 조정이었다. 전투 후, 수군은 생존자 중심으로 재정비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영광스럽지 않다.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고, 누구도 ‘기적’이라는 말로 그 희생을 축소할 수 없다. 이순신 역시 그 죽음 앞에서 영웅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까지 보여주는 것은, 화려한 전략이 아닌,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순신을 따라 백성들이 노를 젓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단순한 전쟁의 여운이 아니라, 연대의 상징이다. 이순신의 의지는 군대에서, 그리고 백성에게로 전염되었고, 그 전염은 결국 전쟁보다 더 긴 이야기를 만든다. 《명량》이 위대한 이유는 그 어떤 장군 영화보다도 지휘관의 외로움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는 데 있다. 이순신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바라는 리더의 초상이다. 그는 명령이 아니라 몸으로 앞장섰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었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원칙을 꺾지 않았다. 그의 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는 전략이 아니라 의지의 문장이다. 그 말이 병사들을 움직였고, 백성을 움직였으며, 결국 한 나라의 흐름을 되돌렸다. 《명량》은 단순한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그건 ‘꺾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사람을 보고 믿고 따르려 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무수한 희생과 외로움, 혼자 감당했던 무게를 안은 채, 이순신은 다시 앞으로 간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싸움은 계속된다. 왜냐하면, 의지란 한 번 이겼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견뎌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우리는 ‘명량’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