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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사랑의 리듬, 선택의 색감, 끝난 꿈의 찬란함

by 안다미로_ 2025. 5. 19.

라라랜드 썸네일

라라랜드 : 사랑의 리듬

영화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사랑을 말하지만, 단순히 음악 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에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감정을 ‘리듬’으로 보여주는 방식 때문이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음악처럼, 리듬을 타듯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리듬이 깨지는 순간, 사랑은 현실과 충돌하며 균열을 드러낸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엇갈린다. 교통 체증 속 클락션, 재즈 바에서의 무시, 파티장에서의 냉소—all of these—는 마치 사랑의 서툰 첫 박자 같다. 하지만 그 엇박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관심이 서서히 쌓인다. 그리고 노을 속 언덕길에서 펼쳐지는 ‘A Lovely Night’ 장면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둘 사이의 템포가 맞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사랑의 시작이 말이 아니라, 발끝에서, 시선에서, 망설임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상징한다. 뮤지컬이라는 형식은 여기서 감정의 증폭장치로 작동한다. 현실에서는 하지 못했던 표현들이 노래와 춤으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다. 세바스찬이 피아노를 칠 때, 미아는 그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고, 둘이 함께 걸을 때, 음악은 그들의 관계를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대사보다 멜로디에 더 많이 담겨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리듬이 늘 일정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바스찬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미아는 실패와 두려움 속에서 자존감을 잃는다. 각자의 삶의 템포가 달라지면서, 그들의 사랑도 엇박을 타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함께였던 리듬이, 이제는 서로 다른 박자에 맞춰 걷게 된다. 그리고 이 느려진 감정의 차이는, 결국 두 사람의 이별로 이어진다. 사랑은 종종 감정보다 속도와 타이밍의 문제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 타이밍의 비극을 리듬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사랑했지만, 같은 속도로 사랑하지 못했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차이가 음악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후반,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하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Epilogue’는 사랑의 리듬이 어떻게 변주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멜로디는 과거의 리듬을 재현하면서도,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의 템포를 반영한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한때 완벽하게 맞았던 리듬이었지만, 끝내 같은 곡을 완주하지 못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사랑은 감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뮤지컬이라는 형식으로 증명한다. 사랑은 함께하는 리듬이고, 그 리듬이 엇갈리는 순간, 감정은 방향을 잃는다. 하지만 그 한때의 리듬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우리는 기억하고, 음악이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서 멜로디는 계속 울린다.

선택의 색감

해당 이야기는 뮤지컬 영화이자, 색채 영화다.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이 작품에서 사랑의 순간마다 색을 다르게 입히며, 감정의 결을 색감으로 시각화한다. 그리고 그 색은 단지 예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선택과 내면을 대변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영화 초반, 미아와 그녀의 친구들이 파티에 가기 위해 나오는 장면은 원색 드레스로 가득 차 있다. 노랑, 빨강, 파랑, 보라. 이 원색들은 각자의 꿈과 가능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아직 정돈되지 않은 젊음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미아는 이 다채로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좇는 과정은 파스텔톤의 카페, 화려한 오디션 룸, 푸른 하늘 아래에서 펼쳐지는 대화처럼, 색채로 기억되는 감정의 축적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중심 장면들이 모두 특정 색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노을빛이 퍼지는 언덕길, 푸른 슈트를 입은 세바스찬, 별빛이 내려앉은 그리피스 천문대—이 모든 장면은 색으로 감정을 고조시킨다. 이 영화에서 푸른색은 꿈과 낭만, 동시에 슬픔과 거리감을 함께 의미한다. 세바스찬의 재즈 클럽도 파란색 조명 속에 있고, 두 사람이 이별하는 장면 또한 푸른 어둠이 깔려 있다. 이처럼 해당 작품은 색으로 선택의 감정을 말한다. 꿈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환상을 껴안을 것인가. 미아는 점점 단정한 색을 입는다. 어수선했던 색감은 서서히 정돈되며, 그녀의 감정이 명확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서로의 삶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칠 때, 화면은 거의 무채색에 가깝게 정리된다. 그 장면은 영화 내내 사용되던 색채가 ‘기억 속으로 물러난 자리’에 남겨진다. 더 이상 꿈도, 사랑도, 환상도 아닌 현실 속에서, 색은 조용히 퇴장하고, 그 자리에 관객의 감정이 채워진다. 감독은 여기서 과감히 채도를 낮추며, “이제는 선택이 끝났고, 색은 감정의 여운으로만 남는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라라랜드 속 색감은 단순히 장르적 연출이 아니라, 결국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시각화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세바스찬은 음악을, 미아는 연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들을 다른 색으로 분리했다. 하지만 그 색채는 여전히 관객의 기억 속에 남아,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가’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한다. 해당 스토리의 색감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정서 그 자체다. 우리가 기억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이 아니라, 어떤 색감이다. 그 색은 어떤 감정의 조각이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의 선택의 조각이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라졌지만, 색은 남는다. 그리고 색은 여전히 그 감정을 회상하게 한다.

끝난 꿈의 찬란함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영화 전체를 다시 처음부터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더 이상 연인이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고, 성공했다. 하지만 서로 없는 성공이라는 현실은, 우리에게 단순한 해피엔딩과는 다른 감정을 남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질문이, 마지막 피아노 연주와 함께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몰고 온다. 세바스찬이 연주하는 ‘에필로그’는 과거의 모든 장면을 재편집하듯 재생산한다. 그 안엔 그들이 겪지 못한 장면, 나누지 못한 시간, 상상 속의 평행 세계가 담겨 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회상이나 후회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찬란함에 대한 예우다. 비록 지나간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감정의 환기. 현실은 그들을 갈라놓았지만, 영화는 ‘만약’을 통해 사랑이 한때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음악과 영상으로 부활시킨다. 그리고 연주는 끝난다. 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세바스찬은 고개를 끄덕인다. 단 한 번의 시선, 그 짧은 눈인사는 이별이 아니라 감사이고, 후회가 아니라 수긍이다. 라라랜드의 결말은 그래서 특별하다. 꿈은 완성되었고, 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이 있었던 시절의 ‘리듬’과 ‘색감’은 관객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다. 관객은 박수를 치거나 눈물을 흘리기보다, 자신의 기억 속 찬란했던 ‘라라랜드’를 조용히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가졌던 순간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 두 문장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작품은 보여준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꿈을 택했기 때문에, 그리고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끝난 사랑. 그 사랑은 실패가 아닌 선택이며, 그 선택은 슬픔이 아닌 성장이 된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라라랜드를 품고 산다. 한때는 함께였지만 이제는 지나간 관계,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시간이 있어 지금의 내가 된 어떤 감정. 이 영화는 그런 감정을 조용히 꺼내어 보여주고, 그 시간들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를 말없이 감각으로 들려준다. 결국 영화는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는 사랑했고, 꿈꿨고, 그 모든 게 끝났지만—그건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찬란함은, 어쩌면 이루어진 꿈보다 더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