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룩 업 : 무너지는 이성
시작은 거대한 혜성 충돌이라는 종말적 재난을 다루지만, 영화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위기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학문과 사실에서 출발한다. 과학자 랜들 민디와 대학원생 케이트 디비어스는 지구를 향해 돌진 중인 혜성을 발견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악관을 찾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명확하고, 데이터는 명백하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부터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아주 냉소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정확한 과학적 근거와 수치, 시뮬레이션과 공식—all of these—는 정작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정보’로 취급된다. 대통령은 중간선거의 여론을 더 신경 쓰고, 언론은 그것을 쇼 화하며 클릭 수로 환산한다. 이성은 현실 속에서 효율성, 이익, 이미지라는 기준 앞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장면들은 과장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일상에서 경험한 세계의 압축이다. 혜성이라는 절대적인 위기는 결국 진실을 중심으로 모두가 모이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 위기는 분열과 조롱, 선택적 망각을 불러온다. “Don’t Look Up”이라는 구호는 더 이상 하늘을 보지 말라는 의미이자, 진실을 보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처럼 작동한다. 이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여기고, 과학자를 ‘불안 조장자’로 낙인찍는다. 이 장면은 과학과 정치, 미디어와 대중의 관계를 비틀며, ‘정상성’이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과학은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회는 감정을 소비하려 한다. 감정 중심의 사회는 충격적 사실보다 더 자극적인 ‘밈’을 원하고, 이슈의 진정성을 판단하기보다 얼마나 웃기고, 공유되기 쉬운지가 더 중요해진다. 디비어스가 TV 방송에서 분노하고 무너지는 장면은, 과학자가 아닌 ‘화난 여자’라는 이미지로 소비되고, 급기야 인터넷 밈으로 퍼진다. 이성의 붕괴는 바로 그 순간, 개인의 진실을 조롱하는 사회적 프레임에서 완성된다. 이 영화는 그 이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아주 교묘하게 그린다. 영화는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 모두가 그 붕괴에 가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회피하고, 웃어넘기고, 정치적으로 소비하는 집단 심리 속에서 진실은 점점 희미해진다. 진실을 외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음을 내는 말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서 진실은 가벼워지고, 종말은 현실이 아닌 루머가 된다. 결국 이 영화가 가장 강하게 경고하는 것은 자연의 파괴보다도 인간 내면의 붕괴다. 진실을 외면하고, 감정에 매몰된 사회는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다. 오히려 위기를 ‘소비’하며, 현실을 ‘엔터테인먼트’로 바꾼다. 이 작품은 묻는다. 우리는 진짜 위험을 직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선택한 무지 속에서 끝을 맞을 것인가?
소비되는 진실
해당 작품은 진실이 단순히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소비되고 소모되는 방식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영화는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진실이 어떻게 팔리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학자들이 들고 온 사실은 한 편의 충격적인 재난 예고편이 되고, 그 사실을 전달하는 자들은 언론, 정치, 자본의 틀 안에서 하나의 ‘콘텐츠’로 가공된다. 주인공들이 출연하는 방송 ‘더 데일리 립’은 그 대표적인 장면이다. 핵심은 명확하다. 지구가 멸망한다. 하지만 진행자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굴 필요 없죠”라고 웃으며 말하고, 오히려 연예인 커플의 재결합 소식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한다. 이 장면은 언론이 진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다룰 수 있는 톤으로 편집하는 데 집중한다는 현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더 나아가, 대통령과 기업가 피터 이셔웰은 이 혜성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본다. 희귀 광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혜성을 통째로 채굴해 이익을 얻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과학자들의 경고는 배제되고, 대신 “위기를 어떻게 수익화할 것인가”라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한다. 이 장면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사실보다 이익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가를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진실은 결국 '팔리는 방식'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SNS에서는 혜성 자체보다 ‘디비어스 밈’이나 ‘#Don’tLookUp’ 챌린지가 더 주목받는다. 사람들은 진실을 읽기보다 스크롤을 넘기고, 데이터보다 감정을 공유한다. 진실이 이슈로 전환되고, 이슈가 유머가 되며, 유머는 광고 콘텐츠가 된다. 이렇게 진실은 점점 경계가 모호한 유희로 소비된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절박한 과학자들이 점점 언론과 마케팅의 방식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엔 거부하던 민디 박사마저도 점차 ‘소프트한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대중을 상대로 ‘팔기 좋은 언어’를 쓰기 시작한다. 진실을 외치는 사람마저도 구조 속에서 변질된다. 이 작품은 진실의 패배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추적한다. 진실은 무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방식으로 ‘가공’되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공포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너무 많이 복제되어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 해당 영화의 진실이 부정당하는 사회보다, 진실이 과잉 유통되며 무가치해지는 세상을 더 위험하다고 본다. 그 소비된 진실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진짜 현실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게 되는 것이다.
남겨진 경고
영화의 결말은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야 찾아온 진실과, 그 안에서 끝까지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조용한 저항을 보여준다. 혜성은 결국 지구에 충돌한다. 그 누구도 막지 못했고, 경고도 무시되었으며, 시간은 진실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는 단순히 “세상은 망했다”가 아니다. “당신은 이 경고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저녁 식사다. 주인공들이 집에 모여 식탁에 둘러앉는다. 가족,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은 도망가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대신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아간다. 이 장면은 종말 앞에서도 인간다움이 가능하다는 마지막 찬가다. “커피 내릴까?” “파이 좀 더 먹을래?” 이 사소한 대사들이 오히려 가장 큰 감정을 끌어낸다. 종말을 앞두고도 우리는 결국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어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통령과 억만장자들은 우주선에 올라 새로운 행성을 향해 떠난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결국 도착한 곳에서 한 마리 새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 블랙코미디적 결말은 자연과 생명 앞에서 인간의 오만함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조롱한다. 과학을 무시하고, 윤리를 버리고, 이익만 좇은 이들의 미래는 기술로 도망친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는 블랙 아이러니다. 작품은 단순히 재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현실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진실을 외면하고, 감정을 소비하며, 위기를 기회로 환산하려는 구조 속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공동체적 신뢰와 이성이다. 그리고 그 붕괴는 절망이 아닌, 습관처럼 다뤄지기 때문에 더 무섭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되묻는다. “우리는 듣고 있었는가?” “그 수많은 경고들 속에서, 단 하나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이 있었는가?” 이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멈춰서, 관객 스스로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결국 남겨진 경고는 단 하나다. 무시하지 말 것, 웃어넘기지 말 것, 익숙하다고 방치하지 말 것. 세상은 언제나 경고하고 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목격할 마지막 장면은 단지 혜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무너진 이성의 잔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