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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아버지의 기억, 선택의 무게, 이어지는 마음

by 안다미로_ 2025. 5. 19.

국제시장 썸네일

국제시장 : 아버지의 기억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일생을 따라가며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는 영화지만, 그 중심에는 단 하나의 감정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기억’이다. 주인공 덕수는 유독 조용한 인물이다. 울지도 않고, 쉽게 화내지도 않지만, 그의 말과 표정, 주름진 얼굴에는 수십 년을 견뎌낸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 영화는 그 기억의 서랍을 하나씩 열어가며,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 세대의 감정을 꺼내 놓는다. 덕수의 인생은 ‘책임’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린 시절 흥남철수 작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약속 하나로 그의 삶은 결정된다. 그 약속은 결코 화려하거나 영웅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좌표이자, 이후 모든 선택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 약속은 덕수에게 개인적인 욕망보다 가족을 앞세우는 삶을 부여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덕수를 일찍 철들게 만들고, 그의 선택은 늘 가족을 위한 것이 된다. 어린 나이에 서독 광부로 떠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그는 결국 가족을 위한 희생의 화신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희생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아프고, 지나치게 담담해서 더 먹먹하다. 덕수는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난 괜찮다”는 말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포기와 상실이 담겨 있다. 영화는 그의 회상 장면을 통해 감정의 진폭을 보여주면서도, 그 감정을 과잉되게 표현하지 않는다. 기억은 늘 덕수 안에만 있고, 관객은 그의 눈빛을 통해서만 그것을 짐작하게 된다. 그 절제된 감정선이야말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다. 흥남철수 당시 동생 막순의 손을 놓치던 장면, 서독 병실에서 사랑을 포기하던 장면, 베트남 전장에서 목숨을 걸던 순간—all of these—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지금도 덕수를 지배하는 ‘기억의 지도’다. 그는 이미 과거를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그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펼쳐지지만, 그것이 거대한 민족 서사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개인의 기억’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덕수라는 개인의 기억은 수많은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이 품고 살아온 기억과 겹쳐지며, 관객에게 공통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그들이 말없이 견뎌온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임을. 영화는 말한다. “당신의 아버지도, 이만큼이나 많은 것을 기억하며 살아오셨다.”

선택의 무게

해당 이야기의 덕수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던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단 한 번도 쉬운 길을 걷지 않았지만, 언제나 가족을 향한 선택을 해왔다. 그가 맞닥뜨린 모든 순간은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속에서 그는 늘 ‘내가 희생하면 모두가 살 수 있다’는 태도로 삶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단순한 가족 부양이 아니라, 한 세대를 지탱한 기둥이 되었다. 서독 광부 파견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다. 목숨을 걸고 갱도에 들어가는 장면, 기계소리에 묻힌 고독, 다른 나라의 언어와 음식 속에서 매일을 버티는 삶. 이 모든 것은 덕수에게 ‘꿈’이 아니라 ‘의무’였다. 그리고 병실에서 간호사 영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그 사랑을 지키기보다 가족을 우선하는 선택을 한다. 그 장면은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를 철저히 거부하며, 오직 책임만이 중심에 놓인다. 또 하나의 선택은 베트남 파병이다. 전쟁터로 향하는 그 순간, 그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위험한 일자리를 택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 한 번 자신을 내던지는 선택을 한 것이다. 베트남에서의 장면은 액션이 아닌 ‘생존의 기록’이다.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돌아가야 할 이유만을 생각한다. 이 선택의 반복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욱 고립시킨다. 덕수는 늘 희생을 택했다. 형제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여동생이 결혼할 수 있도록, 어머니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나중엔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같은 기준을 강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때로 냉정해지고, 고집스러워지며, 사랑받기보다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 내면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한 사람의 깊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다. 해당 작품은 이 모든 선택이 모여 ‘한 인생’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선택은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오해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무게다. 그는 자신을 위해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선택 덕분에 수많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이겨낸 사람만이 남긴 삶의 흔적은 단지 개인사를 넘어, 한 시대의 초상이 된다. 이 영화는 선택의 대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덕수는 자신의 선택을 자랑하지도,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모든 순간을 ‘살아냈다’. 그리고 관객은 그의 선택을 통해 깨닫는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우리는 서 있다. 그 무게를 말없이 견뎌낸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평범한 일상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이어지는 마음

영화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전체의 감정을 정리하면서도, 조용히 울리는 감동을 남긴다. 덕수는 한 시대를 통과했고, 수많은 선택을 했고, 결국 한 가정을 지켜냈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세상은 변했다. 가게도, 사람도, 거리도 모두 사라졌지만, 기억만은 여전히 덕수 안에 살아 있다. 그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덤덤하게 말하는 장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 뒤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쌓여 있다. 그리고 관객은 그 표정에서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이 영화는 특정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많은 ‘덕수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덕수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마주하는 상상의 시퀀스다. 그 장면에서 덕수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아버지는 다정하게 웃는다. “수고했다”는 짧은 말 한마디. 그 한 문장이 지금껏 그가 원해온 단 하나의 보상이었음을 관객은 느낄 수 있다. 덕수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었던 아들이었을 뿐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왜 가족 영화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개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무게와, 그 무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버텨낸 마음을 그린다. 덕수는 말하지 않지만, 자식들은 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살아왔는지를, 그 눈빛과 손끝에서 읽어낸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과거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라도, 그 감정을 이해하고, 기억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그 희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보여주는 기억의 계승, 마음의 유산이다. 작품은 “가족을 위해 참아야만 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만, 동시에 “그 마음을 이제는 나누어야 할 시간”이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과거를 박제된 역사로 보지 않고, 현재를 만든 감정의 축적물로 바라보게 만든다. 덕수의 삶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보통의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된다. 결국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가의 평범했던 인생이, 한 시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삶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 안에 남아, 이어지고 있다. 그 마음을 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덕수의 인생을 기억해야 하는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