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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봉쇄된 한강, 가족의 질주, 괴물의 진실

by 안다미로_ 2025. 5. 31.

영화 괴물 썸네일

괴물: 봉쇄된 한강

영화의 시작은 강렬하다.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강, 그 강의 평화로웠던 수변 풍경이 단 한순간에 공포로 변한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산책하고, 연을 날리고, 커피를 마시던 공공의 공간에서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타나 사람들을 사냥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충격 그 자체다. 이 장면은 단지 공포의 출발점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안전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는 메타포이자, 일상이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선언이다. 괴물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이 생물체가 미군 기지에서 배출된 포름알데히드에서 비롯된 돌연변이라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이 설정은 단지 SF적인 재미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깊은 울림을 준다. 2000년대 초, 주한미군 기지에서 유독성 폐수가 한강으로 무단 방류된 일이 있었다. 이 작품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즉, 괴물은 ‘창작된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방치하거나 외면한 현실에서 탄생한 괴물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자연재해나 초자연적 존재의 공포와는 다른 층위를 갖는다. 인간이 만든 공포, 특히 권력과 제도의 무책임이 낳은 결과로써의 괴물은 훨씬 더 날카롭고 무섭다. 괴물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정부는 한강을 봉쇄하고,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을 들어 공포를 확산시키며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한다. 그 과정에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포를 통제할 수 있는 명분과 시스템이다. 영화 속 정부는 괴물의 실체보다 ‘보도자료’와 ‘긴급회의’에 더 집중한다. 한강은 시민의 공간이 아닌, 국가의 소유물로 탈바꿈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공포는 익명화된 통계와 브리핑으로만 전달된다. 이 봉쇄는 단지 물리적인 공간 폐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의 봉쇄, 인간성의 봉쇄, 진실의 봉쇄다. 시민은 더 이상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시에 따라야 하는 숫자로만 존재한다. 이 작품이 한강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단순한 공간 선택이 아니다. 한강은 서울의 중심이자, 삶과 여가의 상징이며, 또한 근대화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벌어진 파괴는 단지 괴물의 위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도 연결된다. 봉준호 감독은 이 지점에서 매우 정치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그는 공포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주체가 괴물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제하려는 권력이라고 말한다. 괴물은 물리적인 존재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통제와 감시, 그리고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구조다. 봉쇄된 한강은 우리 사회가 위기를 마주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투명한 소통보다 보도자료, 시민의 불안보다 권위 유지, 생명의 가치보다 시스템의 절차가 앞선다. 그 안에서 인간은 언제나 뒷순위로 밀린다. 이 이야기는 이처럼 한강이라는 공공 공간을 봉쇄함으로써, 그 안에 깃든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괴물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 존재는 과연 강 속에만 있는가. 아니면 그 괴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위기를 기회로 삼는 또 다른 시스템일까. 영화는 이 질문을 던지며 시작부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괴물의 모습이 드러나기 전부터 이미, 공포는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의 질주

이 서사는 겉으로 보기엔 재난 영화, 괴수 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가족의 이야기, 그것도 무기력하고 해체되어 가던 가족이 위기 속에서 다시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박강두는 한강 매점에서 잠을 자고 손님에게 거스름돈도 제대로 못 주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딸 현서가 있지만, 딸의 교육이나 생활을 책임질 능력도, 책임감도 없어 보인다. 그의 아버지 박희봉은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묵묵히 일한다. 강두의 여동생 남주와 남동생 남일 역시 각자의 삶에 몰두해 있다. 남주는 국가대표 양궁선수지만 늘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고, 남일은 대학을 나왔지만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이 가족은 한 지붕 아래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다. 하지만 괴물에 의해 현서가 납치되면서 가족의 동력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순간부터 박 씨 가족의 끝없는 질주를 보여준다. 그들은 정부와 경찰의 지원 없이, 그 어떤 합법적인 수단도 없이 오직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초반엔 우왕좌왕하며 갈등하고 서로에게 실망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강두는 지하 하수도 속을 헤매고, 남일은 몰래 정보를 수집하고, 남주는 오로지 활을 쏘기 위한 한 발의 기회를 기다린다. 그들의 질주는 무모하고 비효율적이며, 때로는 실수투성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살아 숨 쉬는 ‘가족의 감정’이 존재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가족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모자라고 부족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조차 위태롭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은 현실적이고 절절하다. 정부가 만들어 놓은 공식적인 구호체계는 무기력하고 관료적이다. 그들은 시민이 괴물에게 잡혀갔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피해자 가족의 절규는 통계의 일부로만 처리된다. 이때 박 씨 가족은 비공식적인 방식으로라도 움직여야만 한다. 가족의 질주는 ‘정부의 부재’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메타포다. 위기의 순간, 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남은 것은 가족뿐이라는 메시지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다. 그리고 그 질주는 단순한 구조 작전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실수에 대한 용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끈을 다시 되찾기 위한 감정의 여정이다. 특히 박강두는 무능하고 어리숙한 인물처럼 그려지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그는 가장 강인한 생존자로 변모한다. 이는 단순한 캐릭터의 성장이라기보다는, 가족을 되찾기 위한 절박한 의지가 만들어낸 변화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눈물겨운 감정들을 쌓아간다. 현서가 하수도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구조를 기다리는 장면, 남일이 모든 걸 포기하려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 순간, 남주가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 등은 모두 질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해당 작품에서 가족은 단지 ‘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감정’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감정은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박 씨 가족의 질주는 정의롭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진심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해당 이야기에서 이 수많은 괴수영화 중에서도 독보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이유다.

괴물의 진실

이 내용이 단지 괴수의 존재를 둘러싼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의 진짜 주제는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력감과 저항에 있다. 괴물의 기원은 극 초반 미군 과학자가 포름알데히드를 하수구에 무단 투기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설정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실제 주한미군이 독성 폐기물을 한강에 흘려보낸 사건이 있었고, 봉준호 감독은 이를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즉, 괴물은 천재지변이나 우연이 아니라, 권력과 무책임이 낳은 결과다. 영화는 이 괴물의 존재를 대하는 사회와 정부의 태도를 집요하게 조명한다. 처음 괴물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지만 정부는 이를 통제하기 위한 ‘감염자’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괴물이 사람을 잡아간 사실보다, 감염의 우려와 확산 가능성이 더 큰 뉴스가 된다. 미군은 '에이전트 옐로'라는 화학물질을 서울 시내에 살포하겠다고 발표하고, 정부는 이에 반대하지 않는다. 공포의 실체보다, 공포를 관리하려는 권력의 논리가 우선시 되는 순간이다. 이때 박 씨 가족은 정부가 방치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된 정보도, 무기도, 지원도 없이 그저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개인들이다. 괴물의 진실은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괴물보다, 그 괴물의 탄생을 방조하고 은폐한 시스템 그 자체에 있다. 영화 후반, '에이전트 옐로'가 살포되면서 시민들은 마스크를 쓰고 도망치고, 군중들은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그 어떤 과학적 설명도, 사회적 토론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이 살포 장면은 마치 현실의 권력이 위기를 대하는 방식의 풍자처럼 보인다. 이 영화 속에서는 괴물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중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하나는 물리적 위협, 또 하나는 구조적 무책임. 괴물은 존재하고, 위협이 되지만, 더 큰 위협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사회 그 자체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희생을 숫자로만 계산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괴물이다. 또한 괴물은 영화 내내 공격적인 존재지만, 그 이면엔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는 점에서 일종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 괴물은 인간이 만든 쓰레기와 독극물 속에서 태어났고, 인간의 탐욕과 실수가 빚어낸 존재다. 그런 괴물을 무조건적 제거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역시 영화는 비판한다. 봉준호 감독은 인간의 책임, 사회의 무책임, 그리고 시스템의 폐쇄성을 강하게 꼬집는다. 박 씨 가족의 노력 끝에 괴물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것이 해피엔딩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괴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괴물을 만든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가 혼자 아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영화 내내 이어졌던 공포의 종식을 의미하기보다는, 이제 더는 믿을 곳이 없다는 냉정한 현실의 단면처럼 다가온다. 괴물의 진실은 그래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다층적이며, 복합적이다.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 단순한 괴수 영화의 틀을 비틀어, 그 안에 사회 고발과 감정의 서사를 집어넣었다. 영화 괴물은 우리가 괴물을 두려워하기보다, 괴물을 만들어내고도 그 존재를 부정하며 책임지지 않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 지점에서 이 서사이자 영화는 시대를 넘어선 영화가 된다. 괴물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괴물의 진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