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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전쟁의 시선, 심리의 참호, 기억의 조각

by 안다미로_ 2025. 5. 28.

고지전 썸네일

고지전: 전쟁의 시선

이 작품은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혼란스러운 고지의 세계,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천천히 비춰주는 감정의 기록이다. 전투는 총구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전쟁은 눈빛 속에 있고, 침묵 속에 있으며, 서로를 의심하는 미세한 표정 사이에서 피어난다. 영화는 고지라는 제한된 공간을 무대로 한다. DMZ가 형성되기 전, 끝없이 반복되던 고지 쟁탈전. 작은 땅을 차지하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는 이 싸움에서 승리의 기준은 죽인 적의 숫자다. 고지 하나가 수많은 목숨과 맞바뀌지만, 그 전투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희미해진다. 왜 싸우는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상부는 단지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은 피를 흘리며 따를 뿐이다. 그 가운데 '강은표' 중위가 고지로 파견된다. 그는 냉정하고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지만, 곧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며, 누군가의 이익과 정치적 의도에 따라 조작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강은표의 눈은 단순히 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 그는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죽음이 전투보다도 더 허무하게 낭비되는 현실을 맞닥뜨린다. ‘분대장 김수혁’과의 관계를 통해 고지 안의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점점 무너져가는지를 보여준다. 전우애, 신뢰, 명령에 대한 복종이라는 군인의 가치들은 고지라는 극한의 공간에서 하나씩 무너진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명령은 생명을 경시하며, 감정은 억압되다 끝내 폭발한다. 고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인간성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을 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전쟁이 되어버린 존재가 된다. 영화의 촬영 또한 이 시선을 따라간다. 좁은 참호, 진흙 범벅의 야간 전투, 숨죽인 병사들의 눈동자. 고정된 고지 위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아래로 내려보지 않는다. 오히려 병사들의 시선과 같은 높이에서 함께 긴장하고, 숨을 죽이고, 고통을 함께 경험한다. 그래서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고지에 직접 올라간 병사가 된 듯한 감각을 느낀다. 해당 이야기는 전쟁을 멀리서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보고 있는 바로 그 시선에서, 피와 땀과 절망이 뒤섞인 채 일어난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이 전쟁은 과연 끝날 수 있는가. 고지는 점령할 수 있는가. 아니,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의문들이 쌓여갈수록, 영화는 더욱 날카롭고 깊어진다. 이 작품 속에서의 전쟁은 그 자체보다, 전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만든 괴물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자신에게로 향한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 총을 들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 남는다.

심리의 참호

해당 스토리의 진짜 전장은 고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내면이다. 참호는 땅에만 파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 안에도 깊게 파인다. 좁고 눅눅한 공간 속에서 병사들은 끝없는 긴장과 의심 속에 갇히고, 서로를 믿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적의 총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동료의 감정이다. 그들은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참호를 공유하지만, 조금씩 금이 가는 시선을 감춘 채 속으로 침잠해 간다. 김수혁과 강은표의 관계는 그런 심리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두 사람은 과거 인연을 공유하지만, 현재 고지에서의 위치는 전혀 다르다. 수혁은 인간미와 전우애를 잃지 않으려 하지만, 은표는 사명감과 규율로 무장한 군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은 서로의 안에서 균열을 발견한다. 전투 중 발생한 석연치 않은 죽음, 감춰지는 보고서,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이 모든 것이 쌓이면서 서로에 대한 의심은 점점 깊어진다. 강은표는 단지 누군가를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진실은 적의 존재가 아니라, 아군 안에 숨겨진 진실이었다. 고지전에서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 명령의 진짜 목적은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배신자인가. 눈앞의 전투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진심으로 고지를 지키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러다 보니 병사들은 점점 내부로 침잠한다. 겉으로는 전투 중이지만, 내면에서는 수많은 선택과 고민이 일어난다. 죽음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다. 총알이 날아드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으려는 것이 더 큰 용기다. 김수혁은 전우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며, 그 죽음이 낭비되지 않길 바라고,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반면 강은표는 이 모든 감정을 꾹 누르며 ‘기록자’로서의 임무를 다하려 한다. 그러나 참호는 그런 냉정마저도 무너뜨리는 공간이다. 점점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전쟁은 누굴 위한 것인가. 진실은 밝혀지는가. 참호 안에서 병사들은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시간 감각을 잃고, 점점 누가 적이고 누가 동료인지 혼동하기 시작한다. 혼란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터진다. 서로를 감시하고, 추측하고, 감정을 억누르다 끝내는 감정이 폭발한다. 그 순간 참호는 더 이상 방어막이 아니라 감옥이 된다.

기억의 조각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전투의 승패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총성이 멎은 뒤에야 비로소 말하고자 했던 것을 꺼내놓는다. 죽은 이들의 시신 위에 덮이는 흙, 기록되지 않는 마지막 총성, 남겨진 이들의 표정은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보다 훨씬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고지는 단순한 전장이 아니었다. 누구는 친구를 잃었고, 누구는 자신을 잃었고, 누군가는 진실을 잃었다. 기억은 분명히 남아 있지만, 그 기억조차도 조작되거나 무시되며 사라진다. 강은표는 전쟁이 끝난 뒤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생존한 증인으로서 고지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 감춰진 명령과 조작된 작전을 복원하려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생존자의 몫이지만, 그 기억을 누가 믿어주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김수혁의 존재는 전쟁 속 인간성과 윤리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는 끝까지 사람을 지키려 했지만, 오히려 그 인간성 때문에 의심받고 배척당한다. 순수한 믿음은 그 참호 안에서는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혁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고, 그의 죽음은 묻힌다. 그런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는, 이 전쟁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와 정치의 도구로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고지는 전쟁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억이 매장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곳에서 이름 없이 죽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며, 남은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강은표는 살아남았지만, 그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매일 밤 떠오르는 장면들, 눈앞에서 무너졌던 얼굴들, 손에 묻은 피와 흙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기록하려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허투루 잊지 않기 위해, 전쟁 속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인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기 위해. 기억은 조각나지만, 그 조각을 모아내야만 진실이 복원된다.